‹ 목록으로 영애님, 장기 두실까요?

1화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숲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부서졌다. 그 빛이 눈을 찔렀다. 손을 짚었다. 흙이었다. 젖은 흙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손가락 사이로 흙이 뭉개졌다. 조금 전까지 나는 학생회관 앞 계단에 있었다. 부회장 선거 결과를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투표율 62퍼센트. 개표율 87퍼센트. 그 숫자들이 아직도 눈앞에 남아 있었다. 장기 동아리 회장 자리도 그대로였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던 것도 기억났다. 발신자는 태민이 아니라 동아리 부원이었다. 그 진동을 확인하려고 손을 뻗은 것까지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긴 어디인가. 일어서려 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접혔다. 허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숨을 들이켰다. 소리 없이. 손바닥을 봤다. 피가 묻어 있었다. 내 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색이 너무 진했다. 검붉었다. 손목을 흔들어봤다. 아픈 곳은 없었다. 그럼 이건 내 피가 아닌가. 질문이 하나 더 늘었다. 답은 없었다. 휴대폰을 찾았다. 주머니에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화면을 켰다. 안테나 없음. 다시 껐다 켰다. 똑같았다. 세 번째로 껐다 켰다. 여전히 똑같았다. 배터리는 71퍼센트였다. 그 숫자만 정직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라이터도 있었다. 대학 축제에서 받은 싸구려 라이터. 플라스틱 몸통에 학교 로고가 찍혀 있었다. 불을 켜려 했다. 손이 떨려서 세 번 실패했다. 첫 번째, 스파크만 튀었다. 두 번째, 바람에 꺼졌다. 세 번째, 손끝이 미끄러졌다. 네 번째에 겨우 불이 붙었다. 작은 불꽃이 흔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지식이 없었다. 경영학과 3학년, 학생회 부회장, 장기 동아리 회장. 재무제표를 읽는 법은 알았다. 포트폴리오 리밸런싱도 할 줄 알았다. 그 어떤 타이틀도 지금 나를 살리지 못했다. 숲에서 살아남는 법을 몰랐다. 방향을 찾는 법을 몰랐다. 물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북쪽이 어디인지, 별자리를 봐야 하는 건지, 나무의 이끼로 방향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느 쪽 면에 낀다는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게 지금 웃을 상황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싸구려 주식이 상한가를 쳤다가 그대로 정지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다음 순서도 모르는. 그때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멈췄다.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거리를 가늠했다. 십 미터쯤 되나. 아니, 더 가까울 수도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회색 그림자가 움직였다. 크기가 개보다 컸다. 어깨 높이가 내 허리께까지 왔다. 눈이 노란빛으로 번뜩였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돌아갔다. 도망친다면 몇 초를 벌 수 있을까. 소리를 지른다면 도움이 올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숫자가 나오지 않았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아니, 변수가 아니라 정보가 없었다. 그림자가 낮게 울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규칙적이었다.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뒤에서 하나 더 나타났다. 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생존 확률이 반토막 나는 느낌이었다. 그런 계산을 할 여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이런 순간에도 나는 숫자를 세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발이 나무뿌리에 걸렸다. 넘어졌다. 등이 흙바닥에 부딪혔다. 숨이 턱 막혔다. 첫 번째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숨을 삼켰다. 눈앞이 하얘졌다. 그 순간, 화살이 날아왔다. 퍽. 그림자가 옆으로 튕겨나갔다. 비명 같은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리고 뚝 끊겼다. 두 번째 화살. 또 하나가 쓰러졌다. 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렸다. 너무 크게. 숲 저편에서 두 사람이 뛰어나왔다. 한 명은 활을 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창을 들고 있었다. 둘 다 짙은 갈색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움직임이 익숙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활을 든 남자가 나를 보고 뭐라고 외쳤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었다. 그 어떤 언어와도 닮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었다. 손등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이 거칠었다. 그리고 크고, 단단했다. 그것이 강태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나는 태호와 그의 동생 태민의 집으로 옮겨졌다. 태호가 나를 등에 업었다. 숲길은 좁고 어두웠다. 발밑에서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만 계속 들렸다. 걸음마다 허리의 통증이 울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았다. 오두막은 작았다. 나무 냄새와 짐승 가죽 냄새가 섞여 있었다. 벽에는 마른 약초 다발이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는 짚이 깔려 있었다. 화로에서 낮게 불이 타고 있었다. 태민이 상처를 살폈다. 손이 거칠었지만 조심스러웠다. 그가 내 허리 쪽을 눌렀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아팠다. 그런데 그가 하는 손짓은 서두르지 않았다. 정확했다. 이런 걸 몇 번이나 해본 사람의 손짓이었다. "...?" 태호가 뭔가를 물었다. 발음이 낮고 짧았다. 질문이라는 건 억양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도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름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태호와 태민이 서로를 쳐다봤다. 짧은 시선 교환이었다. 그 안에 뭔가 오갔다.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태민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나는 아직 몰랐다. 밤이 깊었다. 오두막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찬 기운이 발끝부터 올라왔다.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여긴 어디인가. 한국은 어디로 갔는가. 머릿속으로 온갖 가정을 세웠다. 꿈일 수도 있다. 그런데 통증은 너무 선명했다. 납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저 짐승은, 저 언어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 어두운 것이 있었다. 오두막 구석에 쌓인 나무 상자. 그 안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소리. 딸그락, 딸그락. 작은 나무패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익숙한 소리였다. 너무 익숙했다. 한국에서, 동아리방에서, 셀 수 없이 들었던 소리. 태호가 급히 그 상자를 발로 밀어 숨겼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숨기려다 실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표정을 아주 잘 알았다. 도박판에서 패를 잘못 낸 사람들의 얼굴. 잃을 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 이 숲, 이 오두막, 이 형제. 그리고 저 나무패. 뭔가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맞아떨어져서 불안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상자를 오래 쳐다봤다. 태호도 나를 오래 쳐다봤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 형제는, 이 낯선 세계에서, 뭔가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게임의 규칙을, 나는 아직 하나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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