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영애님, 장기 두실까요?

2화

명월대륙이라는 이름을 배운 지 열흘째 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 "밥, 주세요." 태민이 박수를 쳤다. 태호는 피식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됐다. 저 사람도 감정이 있구나, 싶어서. 언어는 손짓과 그림, 반복으로 익혔다. 하루에 열 개 단어씩. 밥, 물, 아프다, 고맙다, 형, 동생. 그리고 하나 더. "미안해." 이 단어는 태민이 먼저 알려줬다. 자기가 제일 많이 쓰는 말이라면서.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몸이 나으면서 나는 오두막 일을 도왔다. 장작을 패고, 가죽을 손질하고, 짐승 고기를 손질했다. 손에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아물고, 또 잡혔다. 서울에서는 마우스 클릭으로만 굳던 손이었다. 지금은 도끼질로 굳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통증이 싫지 않았다. 뭔가를 하고 있다는 감각. 그게 오랜만이었다. 오전 6시. 태호와 태민이 사냥을 나갔다. 오후 4시. 둘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첫날, 태호가 말했다. "짐승이 안 보였어." 둘째 날, 태민이 말했다. "덫에 아무것도 안 걸렸어." 셋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가장 무거웠다. 나는 세 사람의 저녁 식탁을 봤다. 말린 채소 몇 조각. 소금에 절인 고기 한 점. 그게 다였다. 넷째 날, 태민이 늦게 돌아왔다. 술 냄새가 났다. 태호가 태민의 옷깃을 잡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오두막 벽을 뚫고 나갈 것처럼 컸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진 못했다. 하지만 한 단어는 알았다. "투전."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태호의 얼굴이 굳었다. 마치 그 두 글자가 저주인 것처럼. 태민이 뭐라고 웅얼거리며 반박했다. 태호가 그의 어깨를 밀쳤다. 태민이 벽에 부딪혔다. 나는 끼어들 수 없었다. 언어가 없었으니까.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태호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나무패들이 가득했다. 그림과 숫자가 그려진, 얇고 길쭉한 패들. 손가락 두 개 길이. 표면이 반들반들했다. 수백 번 만졌던 흔적이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물었다. 태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 오두막 안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빚." 그 한 글자로 모든 게 설명됐다. 다음 날, 나는 마을 어귀에서 처음으로 도박장 간판을 봤다. 낡은 나무 건물이었다. 지붕 한쪽이 기울어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욕설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가까이 가자 냄새가 났다. 싼 술, 담배, 그리고 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태민이 그 건물을 지날 때마다 걸음이 빨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마치 그 건물이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태호는 반대로 걸음이 느려졌다. 발이 땅에 붙는 것처럼. 매번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나는 그 차이를 눈여겨봤다. 한 사람은 유혹에 도망치고, 한 사람은 유혹에 붙잡혀 있었다. 밤에 오두막에서, 태호가 술에 취해 털어놓았다. 술은 도박장에서 얻어 마신 것 같았다. 싼 냄새가 옷에 배어 있었다. "삼 년 전에... 형이... 아니, 내가 시작했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태민이는 나 때문에 배웠어." 그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지금 우리가 진 빚이..." 태호가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셋.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금화 스물일곱 개." 숫자가 방 안에 무겁게 떨어졌다. 나는 그 숫자가 얼마나 큰지 감이 없었다. 하지만 태호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람을 짓누르는 무게였다. 사냥으로 버는 돈은 은화 몇 개. 한 달에 금화 한 개를 겨우 만졌다. 스물일곱 개를 갚으려면, 지금 속도로는 이 년이 넘게 걸렸다. 이 년. 태호는 지금 스물 몇 살일까. 그 계산을 하다가 그만뒀다. 너무 잔인한 숫자였다. 나는 그 순간,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대학교 동아리방, 낡은 장기판. 나무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공기. 선배가 내 손을 툭 치며 말했다. "너 이거 진짜 잘 두네." 그때 내 손끝에 느껴지던 나무 말의 감촉. 차갑고 매끈했다. 나는 전국 대학생 장기 대회에서 3위를 한 적이 있었다. 트로피는 아직도 본가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거다. 그때는 그게 인생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취업에도, 연봉에도 도움이 안 되는 취미. 그렇게 치부했다. 지금은 달랐다. 태호의 잠긴 눈, 접힌 손가락 세 개, 그 무거운 숫자. 그 모든 게 겹쳐지며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태호 형." 내가 처음으로 그를 형이라 불렀다. 그 말에 태호의 눈이 커졌다. 술기운이 살짝 걷히는 것 같았다. "투전 말고, 다른 걸 해봐요." "다른 거?"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나뭇가지로 땅에 사각형을 그렸다. 가로 아홉 칸, 세로 열 칸. 손이 떨렸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게 맞는 방향인지 몰라서. "이건 뭔데." "장기." 내가 대답했다. "운이 아니라, 머리로 이기는 거예요." 태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의심과 희망이 동시에 있었다. 그 두 개가 그의 눈 속에서 부딪히는 게 보였다. "그게 돈이 돼?" "돈이 되게 만들 거예요." 확신은 없었다. 다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아는 건 딱 하나였다. 투전은 운이고, 장기는 실력이다. 운은 배울 수 없지만, 실력은 가르칠 수 있다. 그거면 됐다. 다음 날부터 나는 나무를 깎아 말을 만들었다. 왕, 사, 마, 상, 포, 차, 병. 서른두 개의 말. 칼질이 서툴러서 몇 개는 부러졌다. 다시 나무를 구하고, 다시 깎았다. 손끝에 굳은살이 하나 더 늘었다. 태민이 신기해하며 하나씩 만져봤다. "이걸로 뭘 하는데?" 그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운 물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 눈빛을 보니, 이 사람이 왜 도박에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뭐든 새로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성격이 나쁜 쪽으로 흘러버린 거였다. 나는 판을 그리고, 규칙을 설명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왕이 죽으면 진다는 것, 차와 포가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 병이 앞으로만 갈 수 있다는 것. 하루 종일 걸렸다. 몇 번이나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태민이 헷갈려하면 처음부터 다시. 목이 아팠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 몰랐다. 밤이 되어서야 태민이 처음으로 나를 이겼다. 아니, 내가 봐준 거였다. 일부러 수를 하나 놓치고, 그가 알아채도록 유도했다. 표정이 환해졌다. "형, 이거 재밌는데?" 그 웃음이 낮에 도박장 앞에서 고개 숙이던 얼굴과 겹쳐졌다. 다른 사람 같았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시선은 판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걸로 도박장에 가자고?" "네." "거긴 투전판이야. 이런 거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가르치면 되죠." 태호가 오랫동안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 속에서 뭔가를 재는 것 같았다. 나를, 아니면 이 계획을. "만약 지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 문제는 그거였다. 나는 이 세계의 도박판 규칙을 몰랐다. 돈이 얼마나 걸리는지, 판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몰랐다. 장기라는 게임 하나로 그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대가가 뭔지도 모른 채, 나는 이미 발을 들이고 있었다. "형." 태민이 태호의 어깨를 잡았다. 목소리가 진지했다. 낮에 보이던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어차피 지금도 잃고 있잖아." 그 말에 태호의 표정이 무너졌다. 잃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거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거다. 태호가 눈을 감았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오두막 안에 남은 건 화롯불 소리뿐이었다. 장작이 타면서 타닥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좋아." 그가 마침내 말했다. 숨이 조금 편해졌다. 승낙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뭔데요." "도박장 주인이 아무 게임이나 받아주진 않아." 태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낮아진 목소리에 다시 긴장이 돌아왔다. "그 사람 앞에서 한 번은 반드시 이겨야 해. 아니면..." 그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대신 창문 밖, 도박장이 있는 방향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치 그 건물 안에 뭔가 무서운 게 있다는 듯이. "아니면 뭐요." 내가 물었다. 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인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눈빛에서, 나는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불 앞에 앉아 있는데도 그랬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