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녁 식탁에 김이 올라왔다.
서아영이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된장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7일 후에 시험 본다고 했지.
네.
노경환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탁, 하고 나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거 신청 취소할 수 있으면 취소해라.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왜요.
마력 서킷 여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준비 없이 도전하면 몸 상한다.
노경환의 목소리에 걱정이 짙게 묻어 있었다.
숟가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유겸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서 저런 표정을 짓는다.
낯설고, 조금은 간지러운 감각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뭐가 괜찮아.
그냥, 감이 좋아서요.
어설픈 말이었다.
노경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이 헛나갔다.
유겸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흙 속성이잖아요. 저도 흙 속성일 가능성 있나요.
노경환이 잠시 침묵했다.
젓가락으로 나물을 뒤적이며 생각을 고르는 눈치였다.
속성은 유전과 무관해. 랜덤이야.
랜덤이라.
유겸의 눈이 반짝였다.
뽑기라는 뜻이네.
뭐?
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노경환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아들을 봤다.
요즘 말투가 좀 이상해졌다, 유겸아.
피곤해서 그런가봐요.
서아영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요즘 학당에서 힘들었잖아요. 서지혁 남작 얘기도 들었고.
유겸의 손이 멈췄다.
젓가락 끝이 그릇 가장자리에서 잠깐 정지했다.
엄마도 알아요?
소문이 다 났어. 남작이 너 결혼 얘기까지 꺼냈다며.
서아영의 눈이 흐려졌다.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노경환의 얼굴이 굳었다.
그놈이 정말 그런 말을.
괜찮아요. 그냥 애들 앞에서 놀린 거예요.
유겸이 대충 넘기려 했다.
하지만 노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끄으윽.
내가 직접 남작가에 가서.
아버지.
유겸이 다급히 붙잡았다.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가시면 더 안 좋아요. 남작이 우리보다 위잖아요.
그래도.
제가 시험 통과하면 다 해결돼요.
확신에 찬 말투였다.
노경환이 아들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오래 유겸의 얼굴에 머물렀다.
너 정말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네.
유겸의 심장이 살짝 빨라졌다.
느낌이 그렇다는 거예요.
노경환은 한참 아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다시 바닥을 긁었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서아영이 국그릇을 하나 더 밀어줬다.
많이 먹어. 시험 앞두고 몸 축나면 안 되니까.
네.
식사가 끝나고, 유겸은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등을 기댔다.
귀걸이가 낮게 진동했다.
지이잉.
숙주, 방금 위험했습니다.
뭐가.
부모에게 미래를 암시하는 발언은 신뢰를 얻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의심도 살 수 있습니다.
알아. 조심할게.
유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낡은 매트리스가 살짝 꺼졌다.
법로, 너 기능이 뭐가 더 있어. 저장 공간 말고.
정신력 회복 촉진 기능이 있습니다. 다만 하루 1회로 제한됩니다.
정신력이라는 게 뭔데.
마력 서킷을 여는 데 필요한 내적 자원입니다. 무리하게 사용하면 두통과 실신을 유발합니다.
그럼 시험 볼 때 그거 써먹을 수 있는 거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제한이 있습니다.
어떤 제한.
숙주의 정신력 총량이 낮을수록 회복 효과도 낮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내 몸이 후져서 이 스킬도 후려서 쓴다는 거지.
간결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유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나는 챙겨주고 하나는 뺏어가고, 이거 완전 사기 뽑기판이네.
밸런스 패치도 못 받는 게임인가 보네.
패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세계 개발자한테 항의하고 싶은데 연락처 있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유겸은 천장을 보고 누웠다.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음 날 아침, 학당 문 앞에 낯선 종이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새 나무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각성 시험 소집 통지]
[대상: 12세~16세 미각성자]
[장소: 왕도 시험탑]
[일시: 7일 후 정오]
시험탑이라는 세 글자가 유난히 커 보였다.
글씨가 유독 진하게 찍혀 있었다.
법로.
네.
시험탑이 뭐야.
각성을 유도하는 특수 공간입니다. 미지의 마력이 응집된 구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세계에 이세계가 또 있다는 거네.
표현이 재밌습니다.
유겸은 게시판 앞에 몰려든 아이들을 봤다.
대부분 표정이 밝았다.
각성을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누군가는 벌써 어떤 속성이 나올지 친구와 내기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유겸과 비슷하게 어두운 표정이었다.
땅만 보며 서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방계 놈들도 여기 있네.
한 아이가 유겸을 흘겨보며 지나갔다.
방계 가문 문양이 옷깃에 새겨져 있었다.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
유겸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게시판을 다시 봤다.
7일 후 정오.
손끝으로 날짜를 짚어봤다.
종이의 결이 손가락 끝에 남았다.
법로, 시험탑 안에서 뭘 하는데.
입장하면 무작위로 속성과 초기 자질이 부여됩니다. 이후 마력 서킷을 여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무작위라니, 완전 뽑기네.
비유가 정확합니다.
유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률형 시스템 지긋지긋한데 여기서도 이 짓이네.
이번엔 유료 재화도 없는데 대체 뭘 갈아넣으라는 거야.
숙주의 신체를 갈아넣게 됩니다.
이야, 참신하네.
그날 오후, 학당 훈련장에서 서지혁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뒤에는 시종처럼 보이는 아이 하나가 따라붙어 있었다.
시험탑 얘기 들었나.
네.
내가 그날 참관인으로 간다.
그렇습니까.
네가 또 실패하면, 곧바로 결혼 절차 서류를 준비할 생각이야.
서지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미리 축하해주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그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따라오던 시종도 유겸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서둘러 뒤를 쫓았다.
유겸은 훈련장 벽에 기대어 하늘을 봤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
혼잣말이 씁쓸했다.
귀걸이가 조용히 진동했다.
숙주, 하나 더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방계 쪽에서 시험탑 참관 명단에 인원을 추가 신청했습니다.
유겸의 표정이 굳었다.
벽에 기댔던 등이 순간 곧아졌다.
방계도 온다고.
네. 정확한 목적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이 단체로 놀러 오는 것도 아니고.
유겸은 미간을 좁혔다.
법로, 이거 그냥 시험이 아니라 관중석까지 갖춘 무대네.
정확한 비유입니다.
박수는 안 쳐줄 거 같은데.
7일 후, 서지혁과 방계 인원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각성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실패는 곧 강제 결혼, 성공하지 못하면 방계의 음모에 명분을 주는 셈이었다.
유겸은 손바닥을 펼쳐 봤다.
작고 서툰 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저녁 바람이 지나갔다.
이 손으로 뭘 해낼 수 있을까.
귀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7일이라는 시간이 그날 밤부터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