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생 황자의 만렙 무공

1화

야근하다 책상에 엎어져 죽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확히는 죽었는지도 몰랐다. 커피믹스 세 봉을 연달아 털어 넣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판기 아메리카노까지 마셨는데 눈이 안 떠졌다. 팀장이 던진 보고서 마감이 새벽 세 시였고, 나는 네 시쯤까지 엑셀 시트와 눈싸움을 하다가 정신을 놓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분명 나는 서울 어딘가의, 창문 하나 없는 사무실 바닥에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비단 이불이었다. 천장에는 금박을 입힌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끝에 닿는 이불의 감촉은 백화점 명품관에서도 만져본 적 없는 질감이었고, 손을 대는 순간 이게 얼마짜리인지부터 계산하려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방값만 해도 내 연봉을 넘길 것 같았다. 그것도 야근수당 안 챙겨주는 회사 연봉으로. 일단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취소해야 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후들거렸다. 겨우 상체를 세우는 데도 숨이 두 번 들어갔고, 그 두 번의 숨에 이미 가슴이 뻐근했다. 헬스장 한 번도 안 빠진 적 없다고 자부하던 내 몸이 이럴 리가 없었다. 이게 뭔가, 내가 이렇게 부실했나 싶었는데, 곧 알았다. 이건 애초에 내 몸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 놓인 자그마한 경대로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갸름하고 곱상한, 병약해 보이는 이십 대 초반 남자. 입술이 파리했고 눈 밑에는 그늘이 짙게 자리 잡았다. 손목은 내가 봐도 어이없을 정도로 얇았다. 딱 봐도 오래 앓은 얼굴이었고, 딱 봐도 이 몸 주인은 나보다 헬스장을 훨씬 덜 다닌 사람이었다. "이게 무슨..." 목소리를 내보니 그것도 낯설었다. 가늘고 힘없는, 방금 감기 걸린 사람 같은 목소리. 원래 내 목소리는 팀장한테 소리도 지를 만큼 우렁찼는데. 그때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이불을 다시 뒤집어쓰려던 순간, 젊은 여자 하나가 들어와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외쳤다. "대황자마마, 일어나셨습니까!" 대황자. 그 단어를 듣고서야 상황이 대충 그려졌다. 나는 죽었고, 여기는 어딘지 모를 세계이며, 나는 지금 이곳의 황실 핏줄로 들어와 앉은 것이다. 그것도 하필 대황자라는, 얼핏 들으면 화려하지만 실상은 병든 몸뚱이를 물려받은 자리로. 이름은 이겸이라 했다. 시녀는 자신을 춘심이라 소개했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어려 보였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만 보면 꽤 오래 곁을 지킨 듯했다. 손끝이 익숙하게 이불을 정리하고, 물그릇을 가져오는 동작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사흘이나 인사불성이셨습니다." "사흘이나?" "예. 어의도 다녀가시고, 서귀비마마께서도 매일 문안 오셨지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타는 것치고는 몸에서 힘이 하나도 안 났다. 이 몸, 진짜 상태가 안 좋구나 싶었다. 춘심은 내가 정신을 잃고 사흘을 앓았다고 다시 설명했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궁 안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돌았다고,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삼황자 쪽에서 또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문안 인사라 하셨지만... 다들 알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 "뭔 뜻인데?" 춘심이 주변을 살피듯 한번 문 쪽을 돌아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마마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게지요. 언제쯤 눈을 감으실지." 와, 직설적이다. 병 문안 온 척 하고 부고 날짜 재는 거였구나. 회사에서 상사 눈치 보던 짬이 이런 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 삼황자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대건국 삼황자 이헌 전하 아니십니까. 다들 다음 태자가 되실 거라 하지요." 이헌. 이 나라 대건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황자라는 그 인물의 이름과, 그의 뒤에 외조부인 조승상이라는 거물이 있다는 것도 춘심의 입을 통해 조금씩 알게 됐다. 조승상은 병부와 이부를 양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라 했고, 그 손자가 바로 이헌이라 했다. 뒷배가 든든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그냥 판 자체가 기울어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 나는? 나는 뒷배가 누군데." 춘심이 잠시 말을 골랐다. "생모이신 서귀비마마이십니다만..." "근데?" "...예전만 못하십니다." 말을 아끼는 춘심의 표정에서 나머지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세력 약한, 병약한 황자. 그게 지금 내 스펙이었다. 현대에서 스펙 안 좋아서 서류에서 떨어지던 게 그리워질 판이었다. 그때는 최소한 목숨은 안 걸었으니까.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근데 여기, 무공이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예, 대건국은 무공이 곧 신분입니다. 아무리 핏줄이 좋아도 힘이 없으면 다들 은근히 무시하고, 서출이라도 무공이 뛰어나면 떠받들지요." 정보를 캐내는 재미가 있었다. 회사에서 상사 뒷담화 캐던 실력이 이런 데서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그럼 나는 무공이 어느 정도인데?" 춘심이 이번에는 아예 대답을 못 하고 눈을 굴렸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마마께서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시어,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셨습니다." 즉, 밑바닥. 대황자라는 명패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딱 잡아먹기 좋은 먹잇감. 삼황자 쪽에서 사람 보내서 문안 인사 핑계로 죽을 날짜 재는 게 이해가 갔다.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춘심이 나가고 혼자 남았다. 밤이 깊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천장의 용 문양을 보며 한숨을 쉬는데, 눈앞에 파란 창이 하나 떴다. [금손가(金手家)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이게 뭔데. 스마트폰도 없는 세계에서 팝업창이라니. 죽어서까지 알림 뜨는 인생이라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일단 손짓을 해봤다. 반응했다. 마치 홀로그램 UI처럼 손끝을 따라 화면이 움직였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이런 거 한 번도 못 써봤을 것 같은데, 손이 알아서 반응하는 게 묘했다. [환영합니다, 계약자 이겸. 금손가는 그대의 몸에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깨울 것이며, 동시에 그대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요구할지어다.] 대가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경계심이 들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전생에서부터 뼈저리게 배운 진리였다. 회사 복지도 알고 보면 다 어디선가 새어나간 내 시급이었으니까. "뭔데, 사기 아니야?" [사기라 함은 상호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라. 금손가는 오직 명확한 거래만을 행하느니.] "그럼 뭘 파는데." [무엇이든 팔 수 있느니라. 다만 값을 치를 수 있느냐가 문제일지어다.] 말투가 예스럽고 거들먹거리는 게 딱 옛날 사극 조연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지금 이 몸으로는 삼황자 쪽에서 사람 하나 보내면 그냥 쥐어터질 판이었다. 뭐라도 붙잡아야 했다. 화면을 넘기자 상점이 나타났다. 무공, 신체 강화, 심지어 회복 아이템까지 온갖 항목이 진열돼 있었다. 목록만 보면 없는 게 없는 백화점이었다. 신체 강화술, 기초 검법, 내상 회복약, 하다못해 '하루 동안 배 안 아픈 부적'까지 있었는데, 그건 왜 파는 건지 진짜 모를 일이었다. 가격을 보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최하급 신체 강화술 하나가 공헌치 오천. 내가 가진 공헌치는 정확히 영이었다. "이거 완전 그림의 떡이잖아." [공헌치는 그대가 세상에 남긴 흔적으로 쌓이는 것이니라. 적을 베거나, 위기를 넘기거나, 혹은...] "혹은?" [음식을 통해 기를 흡수하는 방법도 있느니.] 음식. 그 단어에서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설명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저쪽은 딱 필요한 만큼만 흘리고 입을 다무는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갑질하는 상사한테서 정보 캐낼 때랑 비슷한 느낌이라 오히려 익숙했다. "음식 먹으면 되는 거면 나 지금 당장 밥 좀 갖다 달라고 해야 하나." [아무 음식이나 되는 것은 아니니라.] "그럼 뭔데." [...그것은 차후에 알게 될지어다.] 말 끊는 타이밍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딱 회사 인사팀이 채용 공고에 "협의 후 결정" 써놓고 나중에 최저시급 던져줄 때랑 똑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있는데 안 알려주는 그 태도, 어디서든 다 똑같구나 싶었다. 일단 창을 껐다. 어차피 지금 당장 공헌치를 쌓을 방법도 마땅히 없었고, 오천이라는 숫자 앞에서 뭘 더 고민해봐야 시간 낭비였다. 다시 이불에 누웠다. 대건국, 대황자, 삼황자, 조승상, 금손가. 낯선 단어들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면 몇 달 안에 삼황자 쪽 사람들이 보낸 문안 인사가 진짜 마지막 문안 인사가 될 판이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데,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 이 몸에 원래부터 있었을 병약함과는 다른, 낯선 무게감이었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뭔가 더 얹혀 있는 느낌. 그 순간, 몸 안 저 깊은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도 아니고, 시스템의 예스러운 어투도 아닌, 낯설고도 익숙한 무언가가. '...누구냐, 넌.' 등줄기로 서늘한 것이 지나갔다. 나는 숨을 죽였다. 방금 그 목소리, 분명 이 몸 안쪽에서 들려왔다. 시스템 창도 아니고, 내 상상도 아니었다. 이 몸에, 나 말고 다른 뭔가가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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