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김치로 마법사 되기로 했다

1화

오후 6시 12분. 졸업 만찬을 열흘 앞둔 복도는 시끄러웠다.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축하한다는 문구, 졸업이라는 글자, 학생회가 급하게 만든 조악한 풍선 장식들.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뛰어다녔다. 나는 그 소음 속에서 사물함 앞에 혼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낡은 교과서 몇 권이 쏟아졌다. 바닥에 흩어진 책들 사이로 낯익은 종이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접힌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편지였다. 언제 넣어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된 편지. 주워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틈에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정이었다. 옆에는 유상준이 있었다.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허정의 손끝이 유상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있는 모습을, 나는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래 바라봤다. 그 손을 처음 잡았던 날이 떠올랐다. 체육관 뒤편, 아무도 없던 곳에서 허정이 먼저 손을 뻗었었다. 손이 차가웠다. 나는 그 차가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손을 잡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슬픈지, 화가 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 강민준." 유상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만찬 때 재밌는 거 준비했는데." "뭘." "와서 보면 알아." 웃음이 얄궂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시험 점수를 자랑할 때, 남을 깎아내릴 때 짓던 표정이었다. 허정은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회피가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줬다. 허정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딱히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워 다시 사물함에 넣었다. 손끝이 종이 표면을 스칠 때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지워진 것처럼. 오후 6시 20분. 조현우가 뛰어왔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들었어?" "뭘." "유상준 그 새끼, 만찬 때 너 무대에 세운다더라." "무대?" "허정이랑 있었던 일, 편지 다 읽는다고." "편지." "네가 쓴 거. 걔가 아직 갖고 있었대."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중학교 때 쓴 편지였다. 어설프고 유치한 문장들. '네 손이 따뜻해서 좋았어'로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그때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인 줄 알았다. 그걸 사람들 앞에서 읽는다. 조현우가 이를 갈았다. "내가 가만 안 둬." "됐어." "뭐가 됐어. 너 지금 표정이 왜 그래." "어떤 표정."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조현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강민준. 너 지금 이상해." "뭐가." "화를 내야 되는 상황이잖아. 근데 넌 지금 남 얘기 하듯이 듣고 있어."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현우 말이 맞았다. 화가 나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유상준을 찾아가서 따지거나, 최소한 눈물이라도 나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몸 안쪽 어딘가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허정과의 관계는 손잡은 것도, 안아본 것도 몇 번 안 됐다. 연애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체육관 뒤편에서 손을 잡았던 게 세 번, 하굣길에 나란히 걸었던 게 열 번 남짓.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유상준은 그걸 전리품처럼 흔들고 있었다. 부끄러워야 하는데 부끄럽지 않았다.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그 공백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야, 강민준." 조현우가 다시 불렀다. "듣고 있어?" "어." "내가 유상준 찾아가서 편지 뺏어올까." "됐어. 그냥 둬." "그냥 두면 만찬 때 다 읽는다니까?" "읽으라고 해." 조현우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짜증이 반쯤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피했다. 오후 7시 3분. 조현우와 헤어지고 혼자 걸었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 발밑에서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다른 소리는 다 사라진 것처럼, 오직 낙엽 밟히는 소리만 세상에 남은 것처럼. 편의점 앞을 지날 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표정이 없었다. 정말로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게 나 자신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 7시 40분. 방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성적표가 놓여 있었다. 숫자가 낮았다. 68점. 54점. 71점. 세 개의 숫자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세 번째 숫자를 보고서야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버지는 재작년에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 아버지는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 넥타이를 풀지도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넥타이를 맨 적이 없다. 어머니는 파트타임으로 두 가지 일을 뛰고 있었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왔다. 그 사이 얼굴을 마주치는 시간은 아침 밥상 앞, 그 짧은 몇 분이 전부였다. "밥은 먹었어?" 어머니가 항상 묻는 말이었다. 나는 항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진짜 대답도 아니었다. 나는 대학을 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이미 웃음거리였다. 집에서는 짐이었다. 밖에서는 놀림거리였다. 그 세 가지가 동시에 참인 순간,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나는 그날 알았다. 성적표를 다시 봤다. 68점. 54점. 71점. 숫자들이 종이 위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볼 때마다 조금씩 더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성적으로는 어디도 갈 수 없었다. 갈 곳이 없는 채로 졸업만 남았고, 졸업식 대신 열리는 만찬에서는 편지가 읽힐 예정이었다.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후 8시 2분. 서랍을 정리하다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남긴 물건들이 담긴 상자였다. 상자 뚜껑을 열자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할머니 방에서 나던 냄새와 똑같았다. 할머니는 항상 오래된 것들을 아꼈다. 낡은 손수건, 색이 바랜 사진, 쓰다 만 편지지 같은 것들. 그 안에서 반지 하나가 나왔다. 은색이었다. 오래되어 색이 조금 바랬다.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원 안에 세 갈래로 갈라진 선. 손가락으로 문양을 쓸어봤다. 표면이 매끄러웠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이 반지를 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봤다. 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반지였다. "이거 할머니가 주신 거였나." 중얼거렸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봤다. 딱 맞았다. 너무 잘 맞아서 오히려 이상했다. 반지 안쪽에도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너무 작아서 읽을 수 없었다. 눈을 가까이 대고 봐도 마찬가지였다. 글자인지 문양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오후 8시 17분. 반지가 손가락 위에서 뜨거워졌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손끝을 따라 열기가 번졌다. 손목까지 올라왔다. 어깨까지. 나는 반지를 빼려고 했다.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잡고 힘껏 당겼다. 살갗이 반지 아래에서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통증이 있어야 하는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뭐야, 이거." 방 안이 흔들렸다. 책상 위 물건들이 떨렸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숨을 멈췄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반지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문이 덜컹거렸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다가 갑자기 멈췄다. 세상 전체가 이 방 하나로 좁아진 것 같았다. 빛이 반지에서 뿜어져 나왔다. 은빛이 방 전체를 채웠다. 빛은 눈부시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웠다. 눈으로 보는 빛인데 피부로 그 냉기가 느껴졌다. 방 안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다. 벽도, 천장도, 내 손도 전부 하나의 색으로 덮였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발밑이 없었다. 떨어졌다. 끝없이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귀가 먹먹했다. 눈앞이 하얘졌다. 몸이 뒤집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대로 곧게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방향이 없었다. 위와 아래가 구분되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반지를 낀 손가락만 여전히 뜨거웠다. 이대로 영원히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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