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오후 3시.
서태림이 반지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어. 돌아갈 수 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지금 바로요."
"조심해. 처음 돌아가는 거라 몸이 힘들 수 있어."
서태림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걱정을 제대로 들을 여유가 없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반지를 만졌다.
표면이 미지근했다.
다음 순간 다시 열기가 손끝을 타고 번졌다.
불에 데는 것 같은데 아프지는 않았다.
그 이상한 감각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팔꿈치로 번져 올라갔다.
눈앞이 하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천장의 무늬가 눈에 익었다.
익숙한 벽지, 익숙한 조명.
창밖은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시계를 봤다.
오후 11시 47분.
"뭐야, 왜 밤이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분명 이세계에서는 낮이었다.
서태림의 서재에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서태림이 말한 시간 비율을 다시 계산했다.
열여덟 시간 곱하기 여섯.
108시간.
나흘 반.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몸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손끝만 움직였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휴대폰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며 숫자가 떴다.
부재중 전화 14건.
문자 37건.
숨을 한 번 삼켰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문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민준아 어디야]
[전화 좀 받아]
[엄마가 걱정하셔서 학교에 신고했대]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조현우였다.
날짜를 확인했다.
나흘 전부터 온 문자였다.
시간을 하나씩 짚어봤다.
첫 문자는 내가 사라진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다음은 그날 오후.
그다음은 그날 밤.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전화가 걸려온 시각도 함께 확인했다.
오전 9시, 오후 1시, 오후 6시, 오후 11시.
같은 하루 안에서도 여러 번.
계산이 맞았다.
1시간에 6시간.
나는 이세계에서 열여덟 시간을 보냈고, 이곳에서는 나흘 반이 흘러 있었다.
숨이 막혔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야, 너 진짜 이해가 안 된다]
[내가 그렇게 걱정했는데]
[됐다]
문자 사이의 시간을 확인했다.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 사이, 정확히 나흘.
그 나흘 동안 조현우가 어떤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이 갔다.
짐작이 가는데도 그걸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 문자는 어제 저녁이었다.
[됐다, 신경 끄자.]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같은 문장을 스무 번쯤 곱씹었을 때, 글자들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목이 조여드는 느낌만 남았다.
숨을 쉬는데 폐까지 공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지 않았다.
화면에는 신호가 끊긴 시각까지 표시됐다.
21초.
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21초였다.
다시 걸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현우야, 나야. 미안해. 사정이 있었어."
말하고 보니 우스운 말이었다.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대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이세계에 소환됐다가 시간 비율 때문에 못 왔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나조차도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말이었다.
음성사서함을 끄고 나서도 휴대폰을 계속 쥐고 있었다.
액정에 손자국이 남았다.
오전 12시 3분.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민준아, 자니?"
노크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평소라면 그냥 문을 벌컥 여는 사람이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더 마음에 걸렸다.
문을 열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며칠 못 잔 사람처럼 초췌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엄마."
"어디 있었어. 며칠을 연락도 없이."
목소리가 흔들렸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흔들리기만 했다.
"친구 집에… 잠깐."
"학교에서 전화까지 왔어."
어머니가 손에 쥔 종이를 내밀었다.
학교에서 보낸 결석 통지문이었다.
나흘치 결석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 도장 네 개가, 내가 다른 세계에서 마늘 하나로 화분을 피우던 시간이었다.
어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으려고 참는 눈이었다.
"밥은 먹었어?"
그 흔한 질문 하나가 명치를 쳤다.
어머니는 아들이 나흘간 사라졌다가 돌아온 순간에도, 가장 먼저 밥을 챙겼다.
"먹었어."
거짓말이었다.
"무리하지 마라."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방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거실로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전 12시 20분.
다시 휴대폰을 봤다.
조현우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 문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됐다, 신경 끄자.]
답장을 쓰려고 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웠다.
다시 썼다.
다시 지웠다.
결국 한 글자도 보내지 못했다.
다른 창을 확인했다.
허정이었다.
대화가 아예 없었다.
원래도 별로 없던 대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공백이 더 눈에 들어왔다.
연락할 사람이 몇 명이나 남았는지, 그 순간 세어보게 됐다.
많지 않았다.
인터넷을 켰다.
학교 익명 게시판에 들어갔다.
[강민준 실종설]
제목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글을 눌렀다.
조회수가 이미 삼백을 넘어가 있었다.
[걔 요즘 학교도 잘 안 나오고, 유상준이랑 뭔 일 있었다던데]
[졸업 만찬 때 뭐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거 얘기 다 퍼졌던데 안 오는 거 보면 쫄았나 봄]
[진짜면 좀 불쌍하고 아니면 관종임]
[근데 걔 원래 조용한 애 아니었나]
댓글 밑에 댓글이 계속 달렸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이름 모를 사람들의 확신이 늘어났다.
아무도 진실을 몰랐다.
그런데 다들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분노도, 억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손끝이 계속 차가웠다.
화면을 끄고 나서도 한동안 그 문장들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오전 12시 40분.
서태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거 증명되면, 자네 위치가 완전히 바뀔 수 있어."
그 말을 하던 서태림의 표정이 생생했다.
평소의 차분한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학자로서, 오랫동안 확인하지 못했던 뭔가를 확인한 사람의 눈이었다.
이세계에서의 성공이 머릿속에서 자꾸 되살아났다.
마늘 하나로 화분의 꽃을 피운 순간.
꽃잎이 하나씩 벌어지던 그 속도.
서태림의 놀란 표정.
그 순간의 기분은 분명 좋았다.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나흘 반이 사라졌다.
조현우가 사라졌다.
엄마의 웃음이 사라졌다.
셈이 맞지 않았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나란히 놓아 봤는데,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반지를 다시 봤다.
손가락에 여전히 끼워져 있었다.
빼려고 했다.
지난번엔 손가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버텼는데, 이번엔 순순히 빠졌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표면에 새겨진 무늬가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평범한 반지처럼 보였다.
평범한 반지가 이세계로 가는 문이라는 사실이, 손바닥 위에 놓고 봐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이걸 다시 끼면, 나는 또 그곳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또 시간을 잃는다.
한 시간이 여섯 시간이 되는 계산을, 이제는 눈을 감아도 할 수 있었다.
서태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자네, 반찬통 안에 뭐가 더 있나."
그 흥분 어린 목소리와,
조현우의 마지막 문자.
[됐다, 신경 끄자.]
두 개가 동시에 머릿속에서 부딪쳤다.
하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세계였고, 하나는 내가 필요했던 세계였다.
어느 쪽이 나를 진짜로 원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느 쪽을 택할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지역번호가 학교 근처였다.
망설이다 받았다.
"강민준 학생이죠?"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
사무적이고 정확한 발음이었다.
"네, 누구세요."
"학교입니다. 졸업 만찬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유상준 학생 쪽에서 학생회에 특별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강민준 학생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어서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상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무슨 내용인데요."
"직접 오셔서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찬은 열흘 뒤입니다."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질문을 하나 더 던지려는데, 그 전에 신호가 끊겼다.
전화가 끊겼다.
열흘.
숫자 하나가 머릿속에 박혔다.
열흘 뒤, 유상준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그게 나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뜨거움이 손끝에서부터 다시 번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열기가 조금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느 쪽을 택하든, 시간은 이미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있었다.
현실의 열흘과, 이세계의 사십 시간이 동시에 초읽기를 시작했다.
어느 쪽 시계가 먼저 멈출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