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혼약식장의 등불은 유난히 밝았다.
청하성 이씨 저택의 대전, 붉은 비단이 겹겹이 늘어진 단상 아래로 문벌 있는 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천장 서까래를 따라 흐렸고, 그 사이로 수십 개의 촛불이 일렁였다. 부채질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낮게 오가는 수군거림. 모든 것이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신랑 자리에 앉은 소년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이도윤.
청하성 성주 이강철의 유일한 아들이자, 십오 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검을 제대로 쥐어보지 못한 폐물 검생. 기령경 일 중에서조차 벽에 부딪혀 넘어가지 못한 자. 사람들은 그를 등 뒤에서 '반쪽짜리 도련님'이라 불렀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고, 무공을 배우려 할 때마다 몸속 기맥이 뒤틀리듯 저항했다. 의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무사들은 혀를 찼다. 가문의 사람들조차 이 소년에게 걸었던 기대를 한참 전에 접었다.
그런 그가 오늘, 청하성에서 가장 화려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러니였다.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뒤척였다.
'여긴··· 어디지.'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었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도윤의 생각이 아니었다.
십육 세 고등학생이었던 한 영혼이, 어느 순간 이 낯선 몸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학원 앞 골목, 브레이크가 밀리는 소리, 그리고 새하얀 빛. 헤드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던 순간, 몸이 붕 뜨는 감각, 그다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도 아니었다. 그저 없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붉은 비단과 낯선 얼굴들 속에 자신이 앉아 있었다.
'꿈인가. 아니면···'
손끝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였다.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 몸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뇌는, 아니 이 몸의 어딘가는, 이곳이 낯설지 않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몸속에서 두 개의 감각이 동시에 깨어났다.
하나는 서늘했다. 마치 서리가 낀 칼날이 심장 한복판에 얹힌 듯한 느낌.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그 감촉은, 이상하게도 통증이 아니었다. 오히려 날이 선 듯한 명료함이었다.
또 하나는 뜨거웠다. 먹물이 핏줄을 따라 번지는 것 같은, 낯설지만 익숙한 온기.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열기는 어깨를 지나 목덜미까지 스며들었다.
검령(劍靈).
서령(書靈).
두 단어가 머릿속에 동시에 새겨졌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알았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던 글자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검의 영혼과··· 글의 영혼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이도윤의 눈앞에서 세상이 잠시 흔들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심장이 두 박자로 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나는 얼어붙은 채, 하나는 타오르는 채. 그 두 개의 리듬이 서로 부딪히며 몸 안에서 진동했다.
그 떨림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단상 반대편, 신부석에 앉은 소녀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임설화.
청하성에서 제일 아름답다 소문난 얼굴에, 열여섯의 나이로 기령경 칠 중에 오른 천재. 붉은 예복 위로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반듯하게 다문 입술, 그 위로 얹힌 차가운 눈매. 그녀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전의 절반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이도윤을 향해 있었으나, 그 시선에는 온기가 없었다. 오히려 벌레를 보는 듯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 임설화가 낮게 불렀다. "저 폐물과 정말 혼약을 맺으라는 겁니까."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은 대전 앞줄까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신부석 옆에 앉은 중년 사내, 임재호가 헛기침을 했다. 임가의 가주였다. 그는 딸의 말에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이마에 옅은 땀이 배어 있었다.
"설화야. 이씨 어르신께서···"
"은혜를 갚는 데 딸의 인생을 쓰시겠다는 겁니까."
임설화의 목소리가 대전을 얼어붙게 했다. 단상 위, 이강철의 눈매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의 손끝이 의자 팔걸이를 가볍게 눌렀다.
'저게··· 내 정혼자라는 건가.'
이도윤—아니, 그 몸에 깃든 낯선 영혼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어제까지 학원 숙제를 걱정하던 그가, 오늘은 무협 소설 속 정략혼약의 신랑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대는 자신을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천재 소녀였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신의 사정보다는 정치적 셈을 더 신경 쓰는 듯했다.
'침착해. 침착해야 한다.'
그는 심장을 짓누르는 낯선 서늘함과 뜨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슴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무언가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과는 다른 박동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투둑.'
소리 없는 파동이 몸 안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얼음이 갈라지고, 그 틈새로 먹물이 스며드는 듀한 감각. 서늘함과 뜨거움이 뒤섞이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흐름은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번졌다가, 다시 심장으로 회귀했다.
대전 안의 촛불이 일순 흔들렸다.
"어···?" 근처에 앉아 있던 노인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불이 왜···"
촛불은 다시 잔잔해졌다. 하지만 그 미세한 흔들림을 눈치챈 이들이 있었다.
단상 뒤쪽, 병풍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청의를 입은 삼인의 검객을 뒤에 세운 채 서 있던 그녀는, 설유란이었다. 청영문의 지도자.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고, 그녀가 서 있는 자리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무거워졌다. 아무도 그녀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않았다.
'방금 그건···'
설유란의 시선이 신랑석의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폐물이라 알려진 이도윤. 그러나 그녀의 감각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기의 흐름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이건 검기가 아니야. 그렇다고 순수한 서기도 아니고.'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기재들을 보아왔다. 검을 쥐는 순간 살기가 터져 나오는 아이도 있었고, 문자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 어느 쪽과도 달랐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하나의 몸 안에서 공존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얼음과 불이 한 그릇 안에서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흐르는 것처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한편, 단상 위의 이강철은 아들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임재호에게, 그리고 그 뒤에 앉은 대장로파의 인물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이 자리가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옆에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부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가 오늘 더욱 크게 느껴졌다.
"임 가주." 이강철이 낮게 말했다. "약속하신 바, 잊지 않으셨겠지요."
임재호가 마른 침을 삼켰다. 과거 전장에서 이강철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 그것이 지금 이 자리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십 년 전 남방 국경에서, 이강철이 아니었다면 임재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빚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이 성주님."
임설화가 아버지를 향해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가문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열여섯의 나이에 기령경 칠 중에 오른 그녀였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는 그저 딸일 뿐이었다.
그때, 예관이 앞으로 나서며 혼약서를 펼쳤다.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신랑 이도윤, 신부 임설화. 양가의 합의로 이루어진 혼약을 이제 공식적으로···"
이도윤—그의 몸속 영혼은 그 순간, 처음으로 또렷하게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논리적인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 이 혼약이 성사되는 순간, 자신의 삶은 통째로 낯선 각본 속에 갇혀버릴 것이라는. 이름도, 신분도, 몸도 자신의 것이 아닌 채로, 정해진 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거부한다. 여기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대전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신랑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은, 예법에 없는 일이었다. 수백 년의 관례를 깨는 행동이었다. 앞줄에 앉은 노인들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도윤아···?" 이강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눈빛 속에는 불안과 의문이 뒤섞여 있었다.
이도윤은 아버지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곧 시선을 임설화에게, 그리고 예관에게 옮겼다. 심장은 여전히 두 개의 박동으로 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놀랍도록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발언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대전 안이 얼어붙었다. 폐물이라 불리던 소년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낮고, 또렷하고, 조금도 떨림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십오 년 동안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만 살아온 이도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임설화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뭐지, 저 태도는.'
그녀가 알던 이도윤은 늘 시선을 피하고, 말수가 적고, 존재감이 없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소년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눈빛부터 달랐다. 어딘가 낯설고, 동시에 묘하게 침착했다.
설유란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재미있는 아이로군.'
그녀의 뒤에 선 검객 셋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대전 안에서, 지금 이 순간,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촛불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이번에는 더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