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며칠 뒤, 저택 근처 저잣거리.
이도윤은 서생의기의 답답함을 잠시 내려놓고 바람을 쐬러 나온 참이었다. 방 안에 갇혀 붓만 쥐고 있던 시간이 벌써 열흘이 넘었다. 종이 위에 새겨지던 미약한 빛도, 손끝을 타고 흐르던 서령의 기운도, 이제는 몸에 익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끔은 바깥바람도 필요한 법이지.'
시장 골목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란스러웠다. 국수 삶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좌판 위에 쌓인 채소들 사이로 파리가 날았다. 상인들의 외침, 사람들의 발걸음, 그 사이로 낮은 소란이 하나 섞여 있었다.
"내라니까! 이번 달 자릿세!"
골목 한구석, 낡은 옷을 입은 노인이 두 명의 건달에게 붙잡혀 있었다. 노인의 어깨는 앙상했고,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굽어 있었다. 근처 상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 지나갔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좌판을 정리하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고, 누군가는 아예 뒷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는··· 정말로 낼 돈이 없습니다."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의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건달 하나가 노인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 옷자락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찌익―' 노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저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걸음을 서둘렀다. 그것이 이 저잣거리의 규칙이었다. 남의 불행에 끼어들지 않는 것. 괜한 화를 자초하지 않는 것.
예전의 이도윤이었다면, 조용히 지나쳤을 것이다. 폐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십오 년, 그에게는 누군가를 도울 힘도, 그럴 자격도 없었다고 스스로 믿었을 것이다. 방구석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시간들. 형제들의 눈초리를 피해 다니던 나날들. 그때의 그였다면 지금도 발걸음을 재촉하며 이 골목을 벗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손끝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었다. 며칠 전 밤, 붓을 쥐었을 때 흐르던 그 기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이 몸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는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은 느렸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그만두시죠."
건달들이 고개를 돌렸다. 낯선 소년의 등장에, 그들은 처음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옷차림은 귀족가의 자제 같았고, 몸집은 저잣거리의 왈패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뭐야, 이 도련님은?" 건달 하나가 이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비웃음이 얼굴에 짙게 걸렸다.
"신경 쓸 것 없으니 가던 길 가라." 다른 건달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마치 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이었다.
이도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소매를 걷었다.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두 건달을 향했다.
'몸이 기억하는 만큼은··· 움직여 줘야 할 텐데.'
검령이 미약하게 반응했다. 이 몸에 잠재된 검생의 힘.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감각은 살아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고, 발바닥에서 무게중심이 저절로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감각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노인을 붙잡고 있던 건달이 팔을 놓았다. 대신 다른 손으로 이도윤을 향해 걸어왔다. 걸음걸이에는 여유가 묻어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뒷골목 생활을 오래 한 자의 걸음이었다.
"도련님, 다치기 싫으면 곱게 물러나쇼."
이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낮췄다. 상대의 발끝, 무게가 실린 어깨, 그리고 허리춤.
건달 하나가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단검을 향해 뻗었다.
'휘릭―!'
칼날이 뽑히는 소리가 골목에 낮게 울렸다. 주변 상인들 몇이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이도윤은 순간 몸을 낮췄다. 배운 적 없는 동작이었다. 머리로 계산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익혀온 것처럼, 무릎이 굽고 허리가 회전했다.
'몸이··· 나보다 먼저 알고 있다.'
시야가 느려졌다. 단검을 쥔 손목의 움직임, 팔꿈치의 각도, 발끝이 지면을 딛는 순서까지. 마치 정지된 그림을 하나씩 넘겨보는 듣했다.
'퍽!'
짧은 소리와 함께, 건달의 팔이 꺾였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챙―' 소리를 냈다.
"어···?"
건달 두 명 모두 얼어붙었다. 팔을 꺾인 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이도윤 자신도, 자신의 몸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손목에는 아직도 저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이게··· 검생의 힘인가.'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확신이 차올랐다. 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것이 이제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남은 건달 하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시죠." 이도윤이 낮게 경고했다. "다음번엔 팔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그를 폐물이라 부르던 시절의 이도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건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뒤,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팔을 꺾인 자는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렸다. 그들의 뒷모습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상인들이 놀란 눈으로 이도윤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서로 귓속말을 나눴고, 몇몇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노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오늘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몸조심하십시오." 이도윤은 짧게 답했다. 더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이도윤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등 뒤로 상인들의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목격한 눈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그중 하나는, 골목 어귀 찻집에 앉아 있던 이현우의 하인이었다. 찻잔을 든 손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방금 그거 봤나?" 하인이 옆에 앉은 동료에게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저 폐물 도련님이··· 건달의 팔을 꺾었어."
"허풍 아니야?" 동료가 미심쩍은 눈으로 되물었다. "그 폐물이? 검기 한 줌도 못 다룬다던 그 도련님이 말이야?"
"내 눈으로 봤다니까. 눈 깜짝할 사이였어. 건달이 단검을 뽑았는데, 그 도련님이 손 한 번 쓰니 그대로 팔이 꺾였어." 하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님께 보고해야 할 것 같은데."
"괜한 말 꺼냈다가 혼나는 거 아니야?"
"이건 다르지. 대공자님이 그 폐물 도련님한테 관심이 없으신 것도 아니고." 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건 빨리 알려드리는 게 낫지."
그렇게, 소문은 조용히 퍼지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의 소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오늘 있었던 일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여러 입을 거쳐 저택 안으로 스며들 것이었다.
한편, 그날 밤 이도윤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낮의 사건이 그에게 새로운 확신을 심어주었다. 창밖으로는 달빛이 스며들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붓통에는 이미 여러 자루의 붓이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지난 며칠간 써온 종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검생의 힘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그럼 서생의기도 분명···'
그는 붓을 들었다. 손끝의 감각이 낮보다 또렷했다. 낮의 그 짧은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던 그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필사가 아니었다. 지구에서 읽었던 이야기 중 가장 깊이 새겨진 한 대목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갔다. 필사는 그저 남의 것을 옮기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달랐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이야기를, 그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일이었다.
먹물이 종이 위에 스며들 때마다, 서령의 기운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손을 통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좀 더··· 좀 더 깊이···'
붓끝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았지만, 문장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 진동은 조금씩 커졌다.
갑자기, 손끝이 뜨거워졌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간 보였던 미약한 빛이 아니었다. 방 전체를 밝힐 만큼, 뚜렷한 빛이었다. 창호지를 통과해 마당까지 새어 나갈 정도의 밝기였다.
'뭐지···'
이도윤의 손이 멈췄다. 붓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낯선 음성이 울렸다.
"들리는가."
짧고, 무게 있는 목소리였다.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래된 무언가의 울림 같았다. 마치 오랜 세월 침묵해 있던 무언가가 처음으로 입을 여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이도윤은 몸이 굳었다. 심장이 한순간 멈춘 듣했다.
'누구···'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그의 말을 막고 있는 듣했다.
"말하지 말라. 듣기만 하라."
그 목소리는 딱 그 두 문장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방 안의 빛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촛불 하나만이 남아 방 안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이도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손끝은 여전히 뜨거웠고,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서령의 다음 단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개입한 건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검령이 반응하던 순간, 필사할 때마다 느껴지던 미약한 기운, 그리고 오늘 밤 처음으로 들린 그 목소리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생의기가 방금 전과는 다른 단계로 넘어갔다는 감각이었다.
종이 위에는, 처음 보는 낯선 문양 하나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문양을 훑어보았다. 종이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문양은, 그가 아는 어떤 글자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촛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도윤은 그 문양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