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허에서 깨어난 후계자

2화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낮은 발소리였는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규칙적으로 담을 넘어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고양이나 들짐승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소리의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한 게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박자를 맞춰 움직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창가에서 몸을 뒤로 물리며 숨을 죽였는데,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느낌이 이렇게 생생할 줄은 몰랐다. '학자 인생 삼십 년에 이런 훈련은 안 시켜줬는데.' 그런 실없는 자조를 속으로 흘리면서도,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는데, 그걸 감추려는 듯 나는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이 몸의 주인이 겁쟁이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강무영이 뛰어들어왔는데,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눈빛만큼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갑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속옷 위에 겉옷만 걸친 몰골이었는데, 그 다급함이 오히려 상황의 심각성을 웅변하고 있었다. "공자님, 즉시 이동해야 합니다." 그가 낮고 빠르게 말했고, 나는 상황을 물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손아귀 힘이 예상보다 훨씬 셌는데, 그 완력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 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쥐어온 사람인지 실감했다. 복도를 지나며 나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목격했는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담을 타고 넘어와 저택의 하인들을 무참히 베어 넘기고 있었고, 그 광경에 나는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의 비명이 짧게 끊겼고, 그 뒤를 이어 둔탁한 소리가 났는데,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아 애써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리셋 버튼도 없다.' 나는 그 생각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강무영의 뒤를 따랐고, 그가 짊어진 장검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되쏘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저 검이 곧 누군가의 피를 볼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그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저들은 누군가?" 나는 뛰면서 물었고, 강무영은 앞을 보며 짧게 답했다. "불명입니다. 다만 목표는 공자님이십니다." 그 단호한 대답에 나는 헛웃음을 삼켰는데, 몸을 빌려 쓴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아이러니했기 때문이었다. 전 주인이 얼마나 원한을 많이 샀으면 이 정도인가 싶어 잠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사이 옆문에서 또 다른 사내가 튀어나왔는데, 덩치가 크고 큰 칼을 한 손에 쥔 채였다. 어깨 너비만 봐도 웬만한 성인 남자 둘은 합쳐놓은 듯한 체구였고, 그가 쥔 칼은 강무영의 것보다 배는 두꺼워 보였다. "공자님, 이쪽입니다!" 그가 소리쳤고, 강무영이 짧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박거석, 후미를 맡아라." 박거석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이를 악물며 칼을 고쳐 쥐었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오래된 신뢰 같은 걸 느꼈다. 말 한마디 없이도 통하는 사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우리는 마차가 세워진 뒷마당으로 향했고, 그 짧은 이동 동안에도 담장 너머에서 계속해서 그림자들이 넘어오는 게 보였는데, 숫자를 대략 헤아려보니 스물은 족히 넘는 듯했다. '스물이라니, 이건 도적이 아니라 군대잖아.' 나는 그 규모에 아연해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 방석에서는 낯선 향 냄새가 났는데, 이 몸의 전 주인이 즐겨 쓰던 향유의 흔적인 듯했고, 그 사소한 냄새 하나에조차 나는 이 몸의 정체성에 대한 어색함을 다시 느꼈다.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강무영이 마부석에 오르며 짧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공자님, 지금 상황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몸을 지탱하며 물었다. "짧게 부탁하지." 그가 답했다. "이가는 최근 조정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문의 반발을 샀습니다. 특히 최근 후계 문제로 내부가 불안정한 시기였고, 이 틈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그 설명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 "저들의 소속은?" 강무영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규모의 훈련된 자객단을 운용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습니다." 그 말에서 나는 이 세계의 정치가 결코 단순한 궁중 암투가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 학자로 살던 시절이었다면 이런 정보는 사료 속 문장 몇 줄로 접했을 텐데, 지금은 그 문장 안에 내가 직접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가 막혔다. "후계 문제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가?" 나는 다시 물었지만, 강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지금은 이동이 우선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안전한 곳에서 드리겠습니다." 그 단호함에 나는 더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차가 좁은 산길로 접어들며 덜컹거리는 사이,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는데, 달빛이 비추는 숲 사이로 검은 형체들이 나무 사이를 스치듯 움직이는 게 보였다. '벌써 따라잡았나.' 나는 그 속도에 소름이 돋았는데, 인간의 몸으로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나뭇가지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그 모습은, 내가 알던 물리 법칙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강 대장, 저들 속도가 정상인가?" 나는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고, 강무영은 창밖을 슬쩍 확인하더니 처음으로 표정에 균열을 보였다. 그 균열이라는 게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정도의 미미한 것이었지만, 지금껏 냉정함만 유지하던 그였기에 그 작은 변화조차 크게 느껴졌다. "투기를 다루는 자들입니다." 그가 답했다. "투기라니, 그게 뭔가?" 나는 되물었고, 그는 짧고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몸속의 기운을 끌어올려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입니다. 상급 무인만이 다룰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세계가 단순한 사극 배경이 아니라는 걸 완전히 실감했다.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개념이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지고 있다는 게, 이 상황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묘하게 흥분되기까지 했다. '이거 죽기 전에 한 번쯤 제대로 구경은 해봐야겠는데.' 나는 그런 철없는 생각까지 하며 창밖을 계속 주시했다. 마차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며 옆으로 기울었는데, 바퀴 하나가 무언가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그 충격으로 나는 마차 벽에 어깨를 세게 부딪혔다. 뼈까지 울리는 통증에 나는 짧은 신음을 삼켰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엄살을 부릴 여유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공자님, 내리십시오!" 박거석이 뒷문을 부수듯 열어젖히며 소리쳤고,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마차 밖으로 굴러 나왔다. 땅바닥에 닿는 순간 무릎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밖으로 나온 순간,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어림잡아도 열 명은 넘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살육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강무영이 검을 뽑아 들며 내 앞을 막아섰고, 그의 등 너머로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의 '전투'라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등에 닿는 그의 체온이 이상하게도 든든하게 느껴졌는데, 동시에 이 사람 하나만 믿고 이 상황을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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