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피인지 남의 피인지는 이제 구분도 되지 않았다. 비릿한 냄새가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숨을 쉴 때마다 쇠맛이 났다.
"장무적, 뒤를 봐라!"
대웅 대장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다. 나는 몸을 반쯤 틀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잘려나갔다.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동맹은 삼백 명이 넘는 병력을 끌고 왔다. 우리 쪽은 서른도 안 됐다. 숫자로 보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반나절을 버텼다. 11단계 내공을 다 쓰고도 버텼다.
버틴 것치고는 결과가 나빴다.
팔이 무거워졌다. 검을 쥔 손목이 후들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다. 놓으면 그대로 끝이니까. 시야 가장자리로 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게 보였는데, 그걸 세고 있을 정신도 없었다.
등에 창이 박히던 순간, 나는 웃었다. 이게 웃길 상황은 아닌데도 웃음이 나왔다. 평생을 무적(無敵)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살아왔는데, 죽는 순간까지 이름값을 못 하는구나 싶어서였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무릎이 땅에 닿는 감각도 이상하게 느렸다. 마치 시간이 늘어지는 것처럼, 눈밭이 아니라 진흙탕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장, 저 먼저 갑니다."
혼잣말이었다. 대웅 대장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시야가 하얗게 뒤집혔고, 그다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건 추위였다.
뼈까지 파고드는, 그런 종류의 추위였다. 등이 시렸다. 창에 찔린 자리인가 싶어 손을 뻗었는데, 상처가 없었다. 옷도 그대로였다. 심지어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이거 뭐야.
손끝으로 등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분명히 창끝이 살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지금 만져지는 건 멀쩡한 살가죽뿐이었다. 옷의 재질도 이상했다. 원래 입고 있던 갑주가 아니라 처음 보는 낡은 무명옷이었다.
일어나 앉았다. 사방이 온통 흰색이었다. 눈, 그리고 더 많은 눈. 회색 하늘 아래로 지평선까지 눈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갗이 아릴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폐 깊숙한 곳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추위가 죽음의 감각과는 달랐다. 살아 있는 몸이 느끼는 추위였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건가 싶었는데, 배가 고팠다. 죽은 사람이 배가 고플 리는 없지 않나.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이 와중에.
정확히는 마지막으로 먹었던 게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전장에 나가기 전 대충 씹어 삼킨 건량이었나. 그거라도 지금은 그리웠다.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눈보라가 잦아든 사이로 저 멀리 검은 점들이 보였다. 나무인지 산인지 구분이 잘 안 됐는데, 걸어보기로 했다. 다른 선택이 없었으니까.
발이 눈에 푹푹 빠졌다. 무릎 높이까지 오는 눈밭을 헤치고 걷는 게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잡아먹었다. 그런데도 숨이 안 찼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걷는 데 집중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발밑의 눈이 이상하게 딱딱해지는 지점이 나왔다. 눈 밑에 뭔가 얼어붙은 게 있는 느낌이었다.
발끝으로 살짝 눌러봤는데, 단단한 게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얼음인가, 아니면 다른 뭔가인가. 확인할 새도 없이 상황이 급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30년 넘게 검을 쥐고 살아온 몸이 먼저 반응했다.
크르릉.
낮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동시에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여섯, 아니 여덟.
목덜미의 털이 서는 듯한 감각이 먼저 왔다. 그다음에야 눈으로 확인했다.
하얀 털을 가진 늑대 형상의 짐승들이 눈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기가 이상했다. 어깨 높이가 내 허리춤까지 올라왔다. 이빨은 손가락만 했고, 눈은 얼음처럼 투명했다.
콧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어 얼굴 주변에 서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발톱이 눈을 긁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는데, 그 소리마저도 위협적이었다.
······큰 개다.
라고 생각하기엔 좀 늦은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놈이 뛰어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 했다. 없었다. 원래 세계에서 쓰던 검이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망했다.
허리춤을 더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짐승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실처럼 늘어져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짧은 순간에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30년 묵은 습관이란 게 그런 거였다. 검이 없으면 손이 검이 된다. 나는 짐승의 목덜미를 향해 손날을 내리쳤다.
콰앙!
소리부터 이상했다. 손날과 짐승의 살갗이 부딪혔을 뿐인데 폭음이 터졌다. 짐승의 몸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며 눈밭에 처박혔다.
터진 살점과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붉은 피가 흰 눈 위에 떨어지는 순간, 그 색의 대비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뭐야, 이거.
놀랄 새도 없었다. 나머지 짐승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짐승들이 뛰어오르는 걸 눈으로 다 좇을 수는 없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몸을 회전시키며 발을 뻗었다. 발끝이 짐승의 옆구리에 닿는 순간, 몸속에서 뭔가가 터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체내 진기, 통제 이탈 — 11단계 완숙】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런 감각이 스쳤다. 시스템 알림 같은 건 아니었고, 30년 수련의 몸이 스스로 하는 계산이었다. 다만 그 계산 결과가 이상했다.
원래 세계에서였다면 이 정도 짐승 여덟 마리 상대하는데 3할의 진기면 충분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몸에서 흘러나가는 기운이 원래보다 몇 배는 짙었다. 마치 이 땅 자체가 내 몸속 진기를 부풀리는 것 같았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이 짐승의 몸통 전체를 관통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이런 감각까지 세세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결과는 순식간이었다.
철퍽, 철퍽, 철퍽.
여덟 마리의 짐승이 차례로 눈밭에 널브러졌다. 나는 마지막 놈의 두개골을 쥐고 있던 손을 펴며 숨을 골랐다.
숨이 하나도 안 찼다.
······이상한데.
원래 세계에서 이 정도 싸움을 벌였으면 최소한 이마에 땀이라도 났을 텐데, 여기선 아무것도 없었다. 몸이 가벼웠다. 오히려 힘이 남아도는 느낌이었다.
손을 펴봤다가 다시 쥐어봤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힘이 넘쳐서, 뭔가를 더 부수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들 정도였다. 이게 정상은 아니지 싶었다.
이 세상,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눈밭 저편의 나무 그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다섯.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30년 묵은 감각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숨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심장박동까지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감각도 원래 세계에서는 없던 거였다.
나는 천천히 그쪽을 돌아봤다.
나무 그늘 사이로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손에는 뼈로 만든 창과 도끼를 들고 있었고, 얼굴에는 하얀 흙 같은 걸로 그린 문양이 있었다. 하나같이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경악, 그리고 그 뒤에 숨은 경계심.
그중 가장 앞에 선 사내가 창을 내 쪽으로 겨눴다. 목에 상처가 세 줄이나 있었는데, 그 상처가 오래되어 하얗게 아문 걸로 봐서 훈장처럼 여기는 모양이었다.
체격은 나보다 한 뼘쯤 작았지만 어깨가 유독 넓었다. 가죽옷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는 문신인지 흉터인지 모를 무늬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
뭔가 말을 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언어가 다른 게 당연했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 말의 뜻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통역기가 심어진 것처럼. 아마 이 땅의 짙은 기운이 하는 짓이겠거니 싶었다.
"저 짐승들을... 혼자서?"
대략 그런 뜻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에 묻은 짐승의 피를 툭툭 털었다. 여기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사경을 헤매다가 정신 차려보니 여기였다고 하면 믿어줄까.
안 믿어줄 것 같았다.
솔직히 나부터도 못 믿겠는 상황인데,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 눈앞에서 그걸 설명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창을 든 사내들이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주고받았는데, 그 와중에도 시선은 단 한 순간도 나에게서 떼지 않았다. 경계심이 몸짓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유독 체격이 큰 놈이 창끝을 살짝 내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검은 눈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다섯 명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방금 전까지의 경계심과는 다른 종류의 반응이었다. 놀란 건지,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구분이 안 됐다. 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다만 분위기가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이상해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눈이 무슨 색인지 나 자신도 지금 볼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검은 눈이라니. 원래 내 눈이 검은색이었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곳에 떨어지면서 뭔가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저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색인 건지.
가장 뒤에 서 있던, 유독 젊어 보이는 사내가 창을 슬쩍 내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그 뒤를 따라 조금씩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려는 건가, 아니면 뭔가 의식을 준비하려는 건가.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