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겼는데 신이라니

2화

오전 9시. 교사실 안,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창밖으로 눈발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계절에 어긋난 눈이었다. 누구도 그 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장현목 선생님이 서류를 다시 펼쳤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현우 학생. 자네 법사학 성적표를 본 적 있나?" "매번 확인하지 않습니까." "확인은 하지. 그런데 왜 그런지는 안 물어봤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성적표에는 언제나 상위권이라는 표시만 있었다. 1등. 1등. 그리고 또 1등. 숨겨온 만큼 드러난 것도 있다는 뜻이었다. 선생님이 서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자네 실습 점수, 이론 점수, 다 좋아. 그런데 이 사이 간극이 문제야." "간극이요?" "이론은 만점에 가깝고 실습은 늘 일정하게 억제되어 있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절하는 것처럼."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목이 말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됐네. 오늘은 이만 가보게." 선생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서류를 덮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나는 인사를 하고 교사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왜 나였을까. 왜 나만 지명되었을까. 그 답을 찾으려 할 때마다 늘 같은 곳으로 되돌아갔다. 20년 전. 나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어머니 박선영은 그날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 그게 어머니가 늘 하는 말이었다. 그날에 대해 물으면 어머니는 항상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무리하지 마라, 옷 따뜻하게 입어라, 그런 말들. 대신 아버지 이태준이 딱 한 번, 취기가 오른 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날 아버지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눈에 초점이 흐릿했고, 손에는 빈 술병이 세 개나 놓여 있었다. "내가 법역을 개척하던 날이었지." 술잔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요람에 널 눕혀놓고 개척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요람 안으로 들어갔어." 그게 무엇이었는지 아버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빛이었다고 했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빛. 그 빛이 요람 속으로 스며든 순간, 아버지의 법역이 완성됐다고 했다. "완성이 아니었어."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터졌다고 해야 맞겠지." 아버지는 그 말을 하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술잔 가장자리를 문지르기만 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에서 두려움을 봤다. 개척자의 눈에서 두려움이라니. 이상한 조합이었다. 그 후로 내 법역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규모로 법역이 커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이유를 몰랐다. 나조차 몰랐다. 그날 요람에 들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명 정령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 학원에서 배웠다. 아주 드물게, 강한 법역이 개척되는 순간에 우연히 이끌려 스스로를 희생하는 존재. 대가로 무엇을 가져가는지는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는 대가를 치른 적이 없다는 것.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 질문이 매번 목 안쪽에 걸렸다. 삼켜지지도, 뱉어지지도 않았다. 오전 9시 30분. 교실로 돌아왔다. 서연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필기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 나를 보는 눈빛만은 평소와 달랐다. "무슨 일이었어요?"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데 얼굴이 그래요?" 나는 웃으려 했다.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명령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현우 오라버니." 서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한테는 말해도 돼요."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삼 년 전, 이 아이는 아무것도 없는 평민 가정의 딸이었다. 법역 개척은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다. 내가 가르쳤다. 삼 년을 매일 밤 붙잡고 가르쳤다. 그리고 성공했다. 서연은 지금 정식 법사가 되어 있었다. 그 삼 년 동안 서연은 딱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내가 왜 그렇게 많이 아는지. 내가 왜 그렇게 빨리 가르칠 수 있는지. 처음 만났을 때 서연의 손은 늘 차가웠다. 겨울에도 난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집이었다. "오라버니, 이거 정말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때 서연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지금 그 손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자신의 법역으로 스스로를 데울 수 있게 됐으니까. "명단에 내 이름만 따로 있대." 결국 말해버렸다. 서연의 눈이 커졌다. "왜요?" "몰라." 정말로 몰랐다. "측정치 때문이에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번 실습 때도 다들 수군거렸잖아요." "들었어?" "들었죠. 다들 대놓고 얘기하던데요."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유독 딱딱하게 느껴졌다. 오후 1시. 수업 시간, 나는 창밖만 봤다. 눈발이 그새 굵어져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하얀 눈. 교수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법역 유지의 세 가지 원칙은…" 귀에는 들어오는데 머리에는 남지 않았다. 뒷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현우 걔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저번에 실습 시간에 법역 크기 측정했잖아. 걔 수치 이상했어." "얼마나." "측정기가 고장 났나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듣기론 삼학년 담당 교수님도 놀랐다던데." "진짜?" "측정기 두 번 다시 켰다잖아. 처음엔 오류라고 생각했대."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귀는 이미 그쪽에 쏠려 있었다. 손가락이 책상 아래에서 저절로 말려들어갔다. 이런 대화는 처음이 아니었다. 입학한 첫해부터 비슷한 말이 돌았다. 숨기려 할수록 소문은 더 커졌다. 실습 시간마다 나는 힘을 절반, 삼분의 일, 때로는 십분의 일로 줄여서 썼다. 그런데도 남들과 비교되는 수치는 언제나 눈에 띄었다. 한번은 십분의 일로도 부족해서 백분의 일까지 줄여봤다. 그래도 반 평균보다 높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쓴 웃음이었다. 김도윤이 옆자리에서 조용히 물었다. "들었어?" "응." "신경 쓰지 마." "안 쓰고 있어." 그 말은 거짓이었다.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도윤은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 누군가 계속 위로를 건네면 견디기가 더 힘들 때가 있다. 오후 2시 40분. 쉬는 시간,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었다. 평범한 학생의 얼굴. 그런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조차 정확히는 몰랐다. 수돗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손끝을 스쳤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물의 온도와는 상관없는 냉기였다. 오후 3시 10분. 수업이 끝났다. 나는 도서관으로 갔다. 법사학 문헌실 구석, 오래된 책들이 쌓인 자리에 앉았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찾지 않는 구역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생명 정령에 관한 기록을 다시 찾아봤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낡은 종이 냄새가 짙어졌다. 한 문단뿐이었다. 겨우 한 문단. 20년을 뒤져도 늘 같은 한 문단이었다. [생명 원소 정령은 극히 희귀한 존재로, 개척 순간의 강력한 파동에 반응해 스스로 뛰어드는 사례가 보고된다. 대가로 무엇을 취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개척자 본인이 아닌, 개척 현장에 있던 타인이 그 영향을 받는다는 정황이 몇 차례 확인되었다.] 타인이 영향을 받는다. 요람에 있던 건 나였다. 영향을 받은 것도 나였다. 그런데 대가는. 대가는 도대체 누가, 무엇을 치른 것인가. 다른 문헌도 뒤져봤다. 비슷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어느 책에는 각주가 하나 달려 있었다. [본 사례는 정확한 관측 기록이 부족하며,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후속 연구. 20년이 지났는데도 후속 연구는 없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연구할 방법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연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위험하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답이 없었다. 20년째 답이 없었다. 책을 몇 권 더 꺼내 쌓아봤다. 색인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생명 정령', '요람', '개척 파동' 같은 단어들을 찾았다. 어느 책에도 내가 원하는 답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잊고 있었다. 창밖을 봤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창밖에 눈이 더 두꺼워지고 있었다. 남강에서는 벌써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손이 멈췄다. 남강. 그 이름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책을 덮었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방 안 온도와는 상관없는 냉기였다. 문헌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서가를 한 번 더 훑어봤다. 혹시 놓친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20년 전 그날에 대한 답은, 여기에도 없었다. 복도로 나오자 눈은 이미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학원 안에서 이 정도로 눈이 쌓인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누군가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오늘 날씨."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명단에 내 이름이 왜 따로 있는지. 법역 수치가 왜 그렇게 튀는지. 20년 전 요람에 들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세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그 셋이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분명해지고 있었다. 창밖 눈발 사이로, 저 멀리 남강 쪽 하늘이 유난히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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