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서준은 몸을 낮췄다.
바닥이 차가웠다. 무릎 아래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는 다섯이었다. 붉은 사자 문양의 갑옷. 어깨에 걸린 곡도. 걸음걸이에는 긴장이 없었다. 느긋했다. 이 저택을 이미 정리했다고 믿는 자들의 걸음걸이였다.
서준은 숨을 죽였다. 커튼 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바람 때문인지, 자신의 호흡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서준은 서윤을 다시 살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숨은 얕고 규칙적이었다. 창백한 얼굴. 이마에 맺힌 식은땀. 아까보다 조금 더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옮길 것인가, 숨길 것인가.
시간이 없었다. 발소리는 이미 계단 아래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선택해야 했다.
방 안에는 벽장이 하나 있었다. 낡았지만 문이 두꺼웠다. 손잡이에 먼지가 쌓여 있는 걸 보면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곳이었다. 서준은 그 먼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열어볼 이유가 없는 벽장이길 바랐다.
서준은 서윤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오히려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벽장 안에 눕히는 동안, 낡은 나무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오래된 먼지. 습기. 그리고 그 사이로 서윤의 옷에서 나는 옅은 열기의 냄새.
"조금만 여기 있어."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입술만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대답은 없었다. 서준은 그 무응답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지금은 서윤이 깨지 않는 것이 나았다.
서준은 문을 살짝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틈을 남겼다. 공기가 통해야 한다는 생각과, 언제든 다시 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방문 옆 벽에 몸을 붙였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벽의 냉기가 옷을 뚫고 살에 스몄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심장은 자기 몸 안에서만 뛰고 있었다.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 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위층은 확인 끝났다고 했잖아."
"단장이 다시 훑으라고 했어. 애새끼가 하나 안 보인다고."
애새끼.
그 말이 서준의 귀에 박혔다. 못이 살에 파고드는 것 같았다. 서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말투에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물건을 찾는 말투였다.
"찾으면 어떻게 해?"
"단장님한테 산 채로 데려가라고 했어. 뭔가 쓸모가 있나 봐."
"운 좋은 놈이네."
낮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코웃음에 가까웠다. 서준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손끝이 서서히 식어가는 걸 느꼈다.
발소리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서준은 숨을 최대한 낮췄다. 숨을 참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너무 오래 참으면 오히려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짧고 얕게. 짧고 얕게. 그렇게 반복했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마치 온 방 안에 자신의 심장 소리만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발소리가 방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정적.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시간. 문 너머에서 손이 문고리를 향해 다가가는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가 스치는 소리.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곡도를 든 손이 무심하게 방 안을 훑었다. 시선이 침대를 지나, 창가를 지나, 방구석을 지났다. 그 시선이 벽장 쪽으로 향하는 순간, 서준은 벽 뒤에서 몸을 움직였다.
무기는 없었다. 계획도 없었다. 오직 하나, 저 남자가 벽장 문을 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준은 방구석에 놓인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서윤이 쓰던 것이었다. 손에 쥐는 순간 그 사실이 떠올랐다. 이건 무기가 아니라 장난감이었다. 서윤이 마당에서 검술 흉내를 낼 때 쥐던 나뭇가지.
지금은 그것 말고 쥘 것이 없었다.
남자가 벽장을 향해 두 걸음을 옮겼다.
서준은 뛰어들었다.
나뭇가지를 남자의 뒷목에 휘둘렀다. 힘은 약했다. 훈련받은 몸이 아니었다. 팔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치듯 휘두른 동작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은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남자가 짧게 비틀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서 서준의 어깨를 밀쳤다.
서준은 벽에 부딪혔다. 등에서 통증이 번졌다.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어린놈이."
남자의 목소리에는 화도 없었다. 재미있다는 투였다. 마치 개미가 발밑을 지나가다 발을 물었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곡도가 서준의 목을 향해 다가왔다.
칼날이 다가오는 속도는 느렸다. 급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 느긋함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그 순간, 복도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죽이지 마. 산 채로 데려가야 한대."
남자가 멈췄다. 곡도의 날이 서준의 목 바로 앞에서 정지했다.
날의 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살에 닿지 않았는데도 마치 이미 베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짧은 정지 속에서, 서준은 그 칼날 너머의 눈을 보았다.
감정이 없는 눈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눈. 그 눈은 서준을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대상. 혹은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로 보고 있었다.
서준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겁이 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이 그 반대를 말하고 있었다. 다리가, 손끝이, 목덜미의 솜털까지 모두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남자가 서준의 옷깃을 움켜쥐고 끌어올렸다.
옷깃이 목을 조르듯 파고들었다. 발끝이 살짝 바닥에서 떨어졌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비웃음이었다. 살려주는 게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남겨두는 것뿐이라는 뜻이 그 말투 안에 다 담겨 있었다.
그때, 복도 쪽에서 새로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남자들의 발소리와는 달랐다. 무겁고, 느리고, 확실했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다른 발소리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방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다른 자들과는 다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판이 더 두꺼웠고, 흉갑에는 사자 머리 문양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금박은 방 안의 흐릿한 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그 남자는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서준을 붙잡은 남자를, 부러진 나뭇가지를, 흐트러진 침대를. 그리고 서준을 보았다.
서준은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다른 하급 무리에게서 느낀 위압과는 종류가 달랐다. 하급 남자의 눈은 감정이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의 눈은 그와 달랐다. 이건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압력이었다. 방 안의 공기가 그 남자를 중심으로 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저택 놈들 중에, 소환 계약자가 있다고 했지."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서준의 몸속, 아까부터 울리고 있는 그 감각의 자리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옷을 뚫고, 살을 뚫고,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직접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단장님한테는 이놈이 아직 아니라고 보고했는데."
하급 남자가 서준을 밀치며 말했다. 서준의 몸이 벽에 다시 부딪혔다. 통증이 다시 번졌지만, 지금은 그 통증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확인해봐야지."
갑옷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 발소리마다 마룻바닥이 조금씩 삐걱거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걸음 사이의 간격이 일정했다. 급하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 태도가 오히려 방 안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서준의 몸속에서, 그 울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웅—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훨씬 급박했다. 마치 시스템이,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몸 안쪽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진동하고 있었다. 심장 옆,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곳.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서준은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아낸 적이 없었다. 이름도, 방법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몸 안에서 울리는 이 감각을 느낄 뿐이었다.
갑옷 남자가 서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은 크고, 손등에 흉터가 몇 개 나 있었다. 오랜 시간 칼을 쥐어 온 손이었다. 그 손이 서준의 가슴을 향해 다가왔다.
그 손이 서준의 가슴에 닿기 직전, 벽장 안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깨어나려는 소리였다.
작은 뒤척임. 옷깃이 나무 벽에 스치는 소리.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방 안의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소리였다.
남자의 시선이 벽장 쪽으로 돌아갔다.
서준의 심장이 다시 얼어붙었다. 이번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벽장 안의 존재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계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벽장 문 하나로 지켜지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저기 하나 더 있었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즐기는 표정이었다. 사냥감을 하나 더 발견한 자의 표정이었다.
서준은 그 미소를 보며,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손끝은 여전히 차갑고, 무릎은 여전히 꺾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머릿속 한 곳에서는 다른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서윤을 지킬 수 없다.
서준은 그 미소를 보며, 몸속의 울림에 처음으로 대답했다.
무엇이든 좋다. 무엇이든 나오라.
부디, 서윤을 지킬 수 있는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