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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모니터 세 대가 뿜어내는 푸른 빛이 반지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 없는 이 방에서 시간을 가늠하는 유일한 방법은 배가 고픈 정도였는데, 지금은 정확히 라면 두 봉지쯤 배가 고픈 시각이었다. 벽시계는 작년 겨울에 배터리가 다 되어 죽어버린 채로 3시 47분에 못 박혀 있었고, 나는 굳이 그걸 고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학교도 안 나가고, 만날 사람도 없고, 오직 이 방과 코드와 나뿐인 생활이었다. '환상영역' 공식 모델링 툴을 띄워놓은 채 나는 손끝으로 마우스를 굴리며 활시위를 당기는 모션 하나를 다듬고 있었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손으로 매만지는 이 작업이 지루하지 않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이보다 재밌는 게 세상에 어디 있냐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화면 속에서 붉은 갑주를 걸친 아처 캐릭터가 내가 짜 넣은 스크립트대로 시위를 놓는 순간, 불꽃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궤적이 살짝 뭉개지는 느낌이 있어서 나는 다시 벡터값을 조정했고, 이번엔 화살촉에서 튀는 불티까지 그럴듯하게 흩날렸다. '이 정도면 됐군.' '적염궁수'. 내가 지난 반년 동안 밤낮없이 데이터를 쑤셔 넣은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세계 대회 출전을 노리고 만든 것이니만큼 스탯 밸런스부터 스킬 트리, 심지어 대사 하나하나까지 내 손으로 짜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회피 모션 하나에도 3일을 쏟아부었고, 궁극기 발동 시 나오는 대사 한 줄을 위해서 밤을 새워가며 어감을 고쳤다. 이 캐릭터가 완성되면 상금으로 반지하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계산이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게 사실이었다. 부모라는 존재가 애초에 곁에 없었으니 후원자도 없고 든든한 배경도 없이, 나는 오직 코드와 밤샘으로 세상과 흥정을 벌이는 열여섯짜리 프로그래머였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대단하다고 했지만, 정작 나한테 필요한 건 격려가 아니라 새 그래픽카드였다. '이 정도면 대회 심사위원들 눈은 확실히 홀리겠군.' 나는 화면에 뜬 캐릭터를 보며 픽 웃었다. 붉은 갑주가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텍스처까지 신경 써서 짜 넣었으니, 적어도 비주얼 점수는 확실히 챙길 수 있을 터였다.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왼쪽 모니터에서 낮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전원 케이블 어딘가에서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방 전체가 흰빛으로 뒤덮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그 빛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망막을 지져대는 듯한 감각을 남겼고, 뒤이어 고막을 찢을 듯한 파열음이 방을 흔들었다. '서버실 화재 사고가 여기서도 재현되는 건가.' 뉴스에서 봤던 어느 IT 기업 화재 사고가 어이없게도 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몸이 뜨거워졌다. 그 열기는 피부를 태우는 종류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상한 열이었다. 마치 몸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불씨를 던져 넣고 부채질을 하는 듯한, 그런 종류의 뜨거움. 나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며 바닥을 붙잡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저림이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지나 목덜미까지 번지는 걸 느끼면서도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입을 벌려 뭐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성대까지 저려버린 건지 숨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지다가 이내 검게 잠식되어갔고, 나는 마지막으로 화면 속 적염궁수가 시위를 놓는 모습을 흐릿하게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꺼졌다. 다시 감각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냄새였다.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와 그 위에 얹힌 알 수 없는 풀 향이 코끝을 찔렀는데, 반지하 방에서는 평생 맡아본 적 없는 종류의 냄새였다. 곰팡이 냄새와 라면 국물 냄새에 익숙해진 코가 이 낯선 향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건 거대한 나무들의 실루엣이었다. 줄기가 어른 몸통 몇 개를 합친 것처럼 굵었고, 그 위로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가려 초록빛 그늘을 만들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마치 무대 조명처럼 특정한 지점만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마저 도시에서 듣던 것과는 결이 달랐는데, 서걱거림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낮게 속삭이는 것 같은 울림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손을 짚었는데, 그 손이 낯설었다. 손등이 지금보다 훨씬 단단하고 마디가 굵었으며, 손목 안쪽에는 본 적 없는 붉은 문양이 얕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문양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지만 지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미약한 열기가 피부 아래에서 응답하듯 일었다. 마치 그 문양이 살아있는 것처럼, 내 손길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워보니 키가 달라져 있었다. 원래의 내 몸보다 조금 더 크고, 팔다리의 근육 결이 낯설게 단단했는데, 이건 마치 게임 캐릭터의 커스터마이징 창에서 몸을 통째로 바꿔치기한 느낌이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보고 팔을 뻗어보는 동안에도 이질감은 가시질 않았다. 반지하 방에서 하루 열몇 시간을 의자에 앉아 지낸 몸치고는 지나치게 균형 잡힌 근육이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탄력도 익숙하지 않았다. '설정한 대로 몸이 굴러가는 건가, 아니면 이게 원래 이 몸의 주인 것인가.' 나는 그런 의문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산맥의 능선이 보였는데, 그 산맥은 지면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구름 위쪽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린 것처럼 허공에 걸려 있었다. 산자락 아래로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어 그 경계가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산의 표면에는 푹 꺼진 계곡과 뾰족한 봉우리가 뒤섞여 있었는데, 그 전체가 지상과 완전히 분리된 채로 하늘에 떠 있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산이 하늘에 떠 있다니, 이건 어느 게임 로딩 화면에서 본 배경 같은데.' 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지만, 나는 애써 그 박동을 무시하며 발끝으로 흙을 밟아보았다. 축축하고 서늘한, 지극히 현실적인 감촉이었다. 이게 꿈이라면 지나치게 정교한 꿈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기계적인 음성이었는데,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건조한 어조였다. "확인. 계승자 후보의 생체 신호가 정상 범위에 진입했습니다." 나는 순간 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짐작해보려 나무 뒤편과 풀숲을 살펴봤지만, 그 출처가 될 만한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새 한 마리조차 없이 고요한 숲속에서 그 목소리만이 유독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이건 또 뭔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도 나는 애써 여유로운 어조를 흉내 내며 허공에 대고 말을 붙여봤다. "거기 누구신가? 사람이 놀라게 갑자기 튀어나오면 곤란하지 않겠나."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여전히 아무런 실체도 보이지 않는 채로. "본 시스템은 적염궁수 데이터 코어에서 파생된 관리 인격체입니다. 귀하는 해당 데이터의 원본 설계자로 확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계승자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침을 삼켰다. 데이터 코어라니, 관리 인격체라니. 내가 짜 넣은 스탯값과 스킬 트리 몇 줄이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올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가 나를 계승자라고 부른다고?' 이건 대회 상금보다도 훨씬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반년간 밤새워 짜 넣은 스크립트 한 줄, 대사 한 마디까지가 지금 이 목소리의 근원이라면, 그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로 자라나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결코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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