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반항이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 지나갔다.
'말 걸지 마 말 걸지 마 제발.'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문틀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어느 순간 그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태리는 문틀에 걸리지 않도록 몸을 숙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8피트짜리 체구가 좁은 방 안에 들어서니 공간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천장이 낮아진 것 같기도 하고, 벽이 좁혀진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닐 텐데, 몸이 먼저 그렇게 착각했다.
"여기는 내 집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왜 노크를 해야 하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침대 위에서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등을 벽에 붙였다. 도망칠 곳도 없는데 그렇게라도 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맞는 말이잖아. 여긴 저 남자 집이고, 나는 그냥... 뭐지. 세입자? 인질? 애완동물?'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속이 뒤틀렸다. 어느 쪽이든 유쾌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내 앞에 다시 웅크려 앉았다. 그 큰 몸이 접히는 걸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위압감이 배로 늘어났다. 자줏빛 눈이 정면으로 나를 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만큼은 또렷하게 빛났다.
"서아가 뭐라고 했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듣고 있었나?'
머릿속으로 방금까지 나눴던 대화를 빠르게 되짚어봤다. 위험한 말이 있었나. 없었나. 아니, 있었다. 관심은 저주라는 말. 그 말을 들었다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거짓말은 하지 마."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방 안 공기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이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내가 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서아가 경고했던 그 부드러움이라는 게,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목소리는 낮고 다정한 결이 섞여 있는데, 그 안에 숨은 뜻은 명령이었다. 부드러운 말투로 협박을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불라는 거네.'
나는 방향을 틀기로 했다. 정면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쪽으로. 정보가 새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저 남자가 다 안다는 게 사실이라면, 감출 이유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봐."
"제 노래를 가져갔잖아요. 근데 그거 앞으로 어떻게 쓰는 거예요? 저는 그거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요."
태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흥미로운 걸 발견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화가 난 얼굴보다는 낫지, 뭐든.
"질문이 실용적이군."
"살아야 하니까요. 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가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 담긴 게 뭔지, 나는 정확히 읽어낼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 시선이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는 것이었다. 사냥감을 평가하는 눈빛인지, 재산을 감정하는 눈빛인지 구분이 안 됐다.
"네 노래는 지금 내 안에 있어."
그가 자신의 가슴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필요할 때 내가 꺼내 쓸 거다. 대신, 내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는 너도 그 힘을 조금씩 돌려받을 수 있어."
"조금씩요."
"네가 나를 만족시키는 만큼."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족시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지만 나는 애써 그걸 눌러 담았다.
'아니, 잠깐만. 그거 말고 다른 뜻일 수도 있잖아.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
하지만 다른 뜻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떻게 만족시키는데요."
"글쎄."
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손길에 닿은 피부가 뜨거워졌다. 무섭기도 하고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손끝이 크고 단단했다. 사람 손이 아니라는 게 그 감촉에서부터 느껴졌다.
"일단은 내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부터."
"그거면 되는 거예요?"
"시작은 그거면 돼."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다른 걸 시도해봤다. 서아가 알려준 정보, 관심은 저주지만 그 관심을 완전히 밀어내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감. 인간이었을 때 배운 게 하나 있었다. 강자의 관심을 완전히 거부하면 그 강자는 흥미를 잃거나, 아니면 더 집착한다. 후자가 이 남자한테 해당될 것 같았다.
'거부하면 재미없어할 거고, 그럼 나한테 더 관심 없어지겠지. 근데 관심 없어지면 나 그냥 버려지는 거 아냐?'
계산이 자꾸 꼬였다. 이 남자한테 관심을 받는 것도 위험하고, 관심을 잃는 것도 위험하고. 결국 답은 하나였다. 적당히,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붙어 있는 것.
"그럼 안 도망갈게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하나만 알려줘요. 여기 있는 다른 애들은 저를 어떻게 볼까요."
태리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신경 쓰이나."
"신경 쓰여요. 인간 출신이라는 게 알려졌잖아요. 여기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저는 아직 몰라요."
"그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경멸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우리 종족한테 인간이란, 사냥감이거나 노예일 뿐이니까."
담담하게 뱉는 말이었는데, 그게 더 무서웠다. 화를 내면서 말했으면 오히려 덜 무서웠을 것 같다. 그냥 사실을 전달하듯 말하는 목소리라서, 반박할 데가 없었다.
"그럼 저는 지금 뭔데요."
"내 것."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 것이라는 표식이 있는 이상,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하지만."
"하지만?"
"실력을 보여줘야 할 거야. 곧, 결사 안에서 시험이 있을 거다. 인간 출신이 진짜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야지."
나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시험이라니.'
"어떤 시험인데요. 저 뭘 해야 하는 건데요."
"그건 가서 보면 안다."
"그게 무슨 대답이에요."
태리가 피식 웃었다. 사람을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인 웃음이었다.
"모르는 채로 임하는 것도 시험의 일부야."
'와, 이 개쉐이야.'
속으로는 욕이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불공평하네요."
"공평한 걸 바랐다면 인간계에 남아 있어야 했겠지."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이 났다. 인간이었을 때 배운 지식들, 계산이나 기계나 전략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게 이 세계에서 무기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진 게 그것밖에 없다는 것도 명백했다.
주먹을 쥐어봤다. 힘이 얼마나 늘었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혔다. 이 세계로 넘어온 뒤로 몸이 달라진 건 알겠는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
"싸움이에요? 아니면 다른 종류예요?"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
"진짜 대답 좀 제대로 해줘요."
"언제인데요, 그 시험."
태리가 일어서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큰 몸이 일어서는 순간 공기가 다시 한번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줏빛 눈이 어깨 너머로 나를 다시 한번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값을 매기는 시선처럼.
"내일."
"내일이요? 그게 다예요? 준비할 시간이 하루밖에 없는데—"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대답 없이, 질문을 허공에 매달아둔 채로.
나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눕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방금까지 있었던 열기가 방 안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내일이라고?'
준비할 시간이 하루뿐이라는 사실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이었다.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준비할 시간까지 없다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조합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가 순서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싸움이면 어떻게 하지, 다른 종족들 앞에서 뭘 증명해야 하는 거지, 인간 출신이라는 게 왜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는 거지.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창밖에서 뭔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인지, 아니면 이 저택 어딘가를 배회하는 다른 존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그걸 맞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