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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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 태영은 삽 하나를 들고 후산으로 향했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잿빛 어둠이 산자락에 낮게 깔려 있었고, 발밑의 이슬 젖은 풀들이 짚신 사이로 스며들어 발끝을 시리게 했다. 태영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후산은 마을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었다. 양민들은 진작에 물 대기 좋은 기름진 밭을 죄다 차지했고, 구품에게 남겨진 것은 돌투성이 비탈뿐이었다. 흙이라기보다는 자갈밭에 가까운 땅이었다. 그나마 고구마라도 자라는 게 다행이었다.
태영은 이른 아침부터 흙을 파헤쳤다.
'스윽, 스윽'
삽질 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손톱 밑에 흙이 새까맣게 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바닥에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잡힌 물집이 터져 진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으나, 그것 역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뿌리, 두 뿌리, 고구마가 자루에 쌓여갔다.
어제 사내에게 당한 일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머니의 기침 소리, 흙바닥에 쓸린 무릎, 사내의 조롱, 그리고 다음 달까지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던 협박까지. 그것들을 지우려는 듯 태영은 삽을 더욱 세게 내리꽂았다.
'퍽!'
돌부리에 부딪혀 삽날이 튕겨 나갔다. 손목이 저릿했다. 태영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캐면 된다."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자루에 담긴 고구마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오늘 저녁 어머니의 밥상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태영을 버티게 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자루에 제법 묵직하게 고구마가 담겼다. 태영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했다.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려 등줄기를 적셨다. 그래도 자루의 무게를 손으로 가늠해 보며, 태영의 입가에는 옅은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때였다.
"어이, 거기 서라."
걸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태영의 어깨가 움찔했다. 돌아보니 최강필(崔强弼)이었다. 촌장의 아들,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비대한 체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뒤에는 그를 따르는 패거리 넷이 히죽거리며 서 있었다. 손에는 저마다 몽둥이나 낫자루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이게 뭐야, 구품 놈이 벌써 뭘 캐냈네?"
최강필이 성큼성큼 다가와 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톱 밑까지 새까만 흙투성이 자루를,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다는 양 아무렇지 않게 잡아채려 했다.
"그건 안 됩니다."
태영이 자루를 끌어당겼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안 돼? 네가 지금 나한테 안 된다고 했냐?"
최강필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두툼한 볼살이 씰룩거렸다.
"이 땅도 원래 우리 아버지 것이었어. 네놈들이 캐는 건 다 우리 거야. 몰랐냐?"
뻔뻔한 억지였다. 이 후산이 촌장의 소유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그 억지는 곧 법이었다.
"이건 제 어머니 약값... 아니, 끼니가 될 겁니다. 부디..."
태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디는 무슨."
'퍽!'
최강필의 발이 자루를 걷어찼다. 고구마들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데굴데굴 굴러 비탈 아래로 흩어지는 것도 몇 개 있었다.
태영의 눈앞이 하얘졌다.
반나절의 노고가, 어머니의 저녁 밥상이, 눈앞에서 짓밟혀 흩어지고 있었다.
"이 자식이, 어디 좀 맞아볼래?"
최강필이 태영의 멱살을 잡았다. 두꺼운 손아귀 힘에 목이 조여왔다. 패거리들이 낄낄거리며 태영을 둘러쌌다.
"야, 이번엔 어디부터 손봐줄까?"
"구품 놈은 코피 터트리는 재미가 최고지."
패거리 중 하나가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며 낄낄거렸다.
그 순간, 태영의 머릿속에 어제의 장면이 다시 스쳤다. 어머니의 기침 소리, 흙바닥에 쓸린 무릎, 사내의 조롱, 그리고 다음 달까지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던 협박까지.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놔."
태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뭐?"
"놓으라고 했다."
'콰악!'
태영이 최강필의 손목을 잡아채는 순간, 뭔가가 터졌다. 태영 자신도 알지 못했던 힘이었다. 팔에 힘줄이 불끈 솟았고, 손끝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순간적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으악!"
최강필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몸이 붕 떠올랐다가 흙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패거리들이 놀라 굳었다.
"이, 이 자식이!"
한 놈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퍼억!'
태영의 주먹이 놈의 복부에 꽂혔다. 놈은 그대로 뒤로 튕겨나가 나무둥치에 부딪혔다.
"컥...!"
숨이 턱 막힌 듯, 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배를 움켜쥐었다.
둘, 셋째 놈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태영은 몸을 낮췄다가 솟구쳤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동작이었으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리가 먼저 반응했고, 팔이 그 뒤를 따랐다. 마치 오래전부터 몸이 이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퍽! 퍼억!'
연달아 주먹과 발길질이 오갔다. 놈들은 하나씩 쓰러져 갔다.
넷째 놈이 낫자루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 미친놈이!"
태영은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낫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태영의 발이 놈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퍼억!'
"으윽!"
놈이 무릎을 꿇으며 신음했다. 태영은 곧바로 놈의 등을 밀쳐 흙바닥에 처박았다.
남은 것은 최강필뿐이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조금씩 거리를 벌리려 애썼지만, 통통한 몸뚱이는 생각처럼 빨리 움직여 주지 않았다.
"너, 너 이 자식... 감히...!"
목소리에는 이미 위협의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두려움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내 어머니를... 우리 집안을... 계속 짓밟을 셈이냐."
태영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최강필은 그 눈빛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 살려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두 손을 모아 빌듯이 내밀었다.
태영은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이내 멈췄다.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다잡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린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몸속 어딘가에서 낯선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그 힘이 어디서 왔는지는 태영 자신도 알지 못했다.
"...꺼져."
최강필은 도망치듯 산을 내려갔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뛰는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웠으나, 지금의 태영에게는 그 어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머지 패거리들도 신음하며 그 뒤를 따랐다. 한 놈은 절뚝거렸고, 다른 놈은 배를 움켜쥔 채 기다시피 걸었다.
산속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낯설게 들렸다.
태영은 흙바닥에 흩어진 고구마를 다시 자루에 주워 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흙 묻은 고구마 하나하나를 주워 담는 손끝에서, 방금 전의 격정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불안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방금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촌장의 아들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이제 이 마을에서 조용히 살 수는 없을 터였다. 태영은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산길을 내려가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
그날 저녁, 소문은 이미 마을 전체에 퍼져 있었다.
"구품 놈이 촌장님 아들을 팼다며?"
"그럴 리가, 그 힘없는 놈이 무슨 수로."
"봤다는 사람이 있대. 혼자서 다섯을 다 쓰러뜨렸다더군."
"다섯을? 말도 안 돼. 그 삐쩍 마른 놈이?"
"내 눈으로 봤다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어. 산에서 내려오는 최강필 도련님 꼴을 봤다는데, 몸이 온통 흙투성이에 절뚝거리면서 왔다더군."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이 섞인 눈빛으로 태영의 집 쪽을 힐끔거렸다. 우물가에 모여든 아낙들은 빨래를 하다 말고 소문을 주고받았고, 저잣거리의 노인들은 담뱃대를 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계집 아들 놈이 그런 힘이 있었나."
"모를 일이지.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니."
"쯧쯧, 어찌 됐든 이제 그 집안은 끝났구먼. 촌장님 성정을 몰라서 하는 소린가."
누군가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촌장의 이름이 나오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그리고 그 밤, 최촌장의 저택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넓은 사랑채, 촛불이 흔들리는 방 안. 최강필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아랫목에 엎드려 있었고, 그 옆에서 촌장은 서성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천것이 감히 내 아들을...!"
최촌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쾅!'
상 위에 놓인 술잔이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아버지, 그놈이... 그놈이 갑자기 힘이 세져서... 저는 그저..."
최강필이 우물거리며 변명했으나, 촌장의 눈빛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입 다물어라. 다섯이서 하나를 못 이겨? 이 못난 놈."
촌장의 호통에 최강필은 어깨를 움츠렸다. 붕대 감은 이마 아래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촌장은 방 안을 서성이다 창밖을 노려보았다. 어둠에 잠긴 마을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였다. 그 어딘가에 태영의 집이 있을 터였다.
"그 계집이 낳은 새끼가... 촌장의 체면을 이리 짓밟다니. 이 소문이 옆 마을까지 퍼지면 어찌 되겠느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촌장의 눈에 점차 살기가 어렸다.
"여봐라."
문밖에서 하인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장정들을 불러 모아라. 그 계집의 아들놈, 뿌리를 뽑아야겠다."
서슬 퍼런 명령이 밤공기를 갈랐다.
하인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방 안에는 촛불만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그 불빛에 비친 촌장의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걱정보다 짙은 분노와, 그보다 더 짙은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그날 밤, 마을의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