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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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마을에서는 큰 굿판이 벌어졌다.
새벽부터 최촌장의 저택 앞마당은 분주했다. 하인들이 짚단을 엮어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 붉은 천과 오색 깃발을 늘어뜨렸다. 마을 아낙들은 떡을 찌고 술을 걸렀으며, 아이들은 낯선 잔치 분위기에 들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 들뜬 공기 아래에는,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옅게 깔려 있었다.
정오가 되자 제단 위로 황포를 걸친 사내가 올라섰다. 송도사였다.
삼각형으로 째진 눈매에, 기름진 얼굴이 대낮의 볕에 번들거렸다. 배는 불룩하니 나왔으되, 걸음걸이는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그가 손짓 하나를 하자, 마을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제단의 오색 깃발을 흔들고 지나갔다.
"이 돌무래골에 떠도는 원귀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하늘이 정한 성녀의 힘이 필요하외다."
송도사의 목소리는 근엄했다. 그러나 그 근엄함 뒤에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마을 전체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즐기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성녀라니, 그게 누구입니까요?"
촌장이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빛에는 이미 짜인 각본이 오가고 있었다. 촌장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을, 앞줄에 앉은 몇몇 노인들만이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백설화(白雪花), 그 아이외다."
송도사가 손가락으로 한 소녀를 가리켰다.
제단 옆에 선 소녀가 사람들의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흰 저고리를 입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한 아이였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그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가 유난히 희었다.
"양년, 양월, 양시에 태어난 아이니,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이외다."
송도사가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백설화의 몸을 위아래로 훑고 지나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하늘이 내린 계시라 여기며, 저마다 감탄과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성녀님이시다..."
"과연, 저렇게 고운 아이라면..."
수군거림이 사람들 사이로 번져나갔다.
태영과 순돌은 인파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뭐야..."
태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라는 게 원래 저렇게 뽑는 거였어?"
순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낸들 아냐."
태영은 짧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백설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백설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눈물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녀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착각하며, 저마다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이제부터 저 아이는 성녀당에 머물며, 매일 밤 원귀를 달래는 기도를 올릴 것이외다."
송도사가 선언하자, 촌장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도사님이십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성녀당에 드는 비용이며, 시중들 아이며,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드리겠습니다."
촌장의 말투가 유난히 살가웠다. 마치 오랜 벗을 대하듯, 그리고 그 벗에게 무언가 큰 빚을 진 사람처럼.
태영은 그 광경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저 둘, 뭔가 손발이 너무 잘 맞는데.'
'게다가 저 도사 놈 눈빛... 도를 닦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태영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
굿판이 끝난 뒤, 백설화가 성녀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별채로 끌려가듯 들어가는 모습을 태영은 지켜보았다. 소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별채의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가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불쌍하다..."
순돌이 중얼거렸다.
"저 애, 원래 부모도 없이 할머니랑 사는데... 이제 할머니도 못 만나는 거 아니야?"
"..."
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성녀당 쪽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의문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어째서 하필 저 아이인가. 어째서 촌장과 도사는 저리도 손발이 잘 맞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성녀당이라는 곳에서 정말 원귀를 달래는 기도가 이루어지긴 하는 것인가.
그날 밤, 태영은 잠이 오지 않았다. 몸속에서 흐르는 낯선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낮에 본 광경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집을 나서 마을을 거닐던 중, 낯선 기운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뒷산 쪽에서였다.
'쿵! 쿵!'
둔중한 소리가 산속에서 울려왔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땅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짐승의 발소리인가 싶었으나, 그 규칙적인 간격을 듣자 사람의 손에 의한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태영은 조심스레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다가갔다. 나뭇가지가 발밑에서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나무 그늘 사이로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보였다. 우람한 근육에, 손에는 커다란 철퇴를 들고 있었다. 웃통을 벗은 상반신에는 굵은 흉터가 여러 개 새겨져 있었다.
노인이 나무 둥치를 향해 철퇴를 내리치자, 두꺼운 나무가 단번에 쪼개졌다.
'콰직!'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태영은 그중 하나가 자신의 발치까지 날아온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저런 힘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노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누구냐."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태영이 황급히 몸을 낮췄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노인은 태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빛이 예리했다. 마치 옷 속을, 살가죽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흠... 네놈, 기운이 예사롭지 않구나. 최근에 뭔가를 마셨느냐?"
"...그걸 어찌 아십니까?"
태영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보면 안다."
노인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마철웅(馬鐵雄)이라 한다. 이 근방을 떠돌며 수련할 만한 곳을 찾는 중이지."
"강태영이라 합니다."
태영이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다.
"이 산중에서 이런 시간에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단련이다. 몸이 근질거려서 말이야."
마철웅이 철퇴를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그 동작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배어 있었다.
마철웅은 잠시 태영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너 말고... 이 마을에 몸이 허약하고 어수룩한 아이가 있지 않느냐?"
태영은 흠칫했다.
"...순돌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가."
마철웅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내가 그 아이의 기맥을 좀 살펴보고 싶구나. 데려올 수 있겠느냐?"
태영은 어리둥절했다.
"순돌이가... 왜요? 그 앤 그냥 몸 약한 애일 뿐인데."
"허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라."
마철웅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밤공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천세선인, 공덕금련(千歲仙人, 功德金蓮)이라 했던가. 하늘이 내린 그릇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천세선인... 공덕금련이요?"
태영이 되물었다. 그 단어가 낯설게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게 뭡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마철웅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먼 산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태영은 그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돌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늘 몸이 약해서 놀림받던 그 친구가, 사실은 뭔가 남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어르신,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순돌이를 본 적도 없으실 텐데."
"기운은 멀리서도 느껴지는 법이다. 특히 저런 기운은 말이야."
마철웅이 산 아래쪽, 마을이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오늘 낮에도 느꼈다. 아주 옅지만, 분명한 기운이었지."
그때였다.
산 아래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 사이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태영아! 태영아, 큰일 났어!"
순돌의 목소리였다. 다급하게 산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태영이 놀라 소리쳤다.
순돌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얼굴은 땀범벅이었고, 옷자락은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져 있었다.
"성녀당에서... 백설화가... 도망치려다가 붙잡혔대! 그런데 송도사가..."
순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숨만 헐떡였다.
"송도사가 뭘 어쨌다는 거냐!"
태영이 순돌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그 도사가 백설화를 죽이겠다고... 원귀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겠다고 했대!"
"뭐라고?!"
태영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까는 성녀라며 떠받들더니!"
"나도 몰라! 그냥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 오늘 밤 안에 처치할 거라고..."
순돌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철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롭던 눈빛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늘한 살기가 스며들었다.
"...제물이라. 그렇다면 그 도사놈, 진짜 도사가 아니로구나."
마철웅이 철퇴를 고쳐 쥐었다. 우람한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이 마을에 뭔가 큰 어둠이 도사리고 있구나."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산속의 밤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마치 그 한마디에 산 전체가 숨을 죽이는 듯했다.
"어, 어르신도 아시는 겁니까? 이 마을에 뭔가 있다는 걸?"
태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세한 건 모른다. 허나 저 도사놈의 기운, 아까 낮에 잠깐 스쳤을 때부터 이상하다 여겼다. 도를 닦는 자의 기운이 아니었어."
마철웅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놈이 어린 계집아이를 두고 제물이니 뭐니 떠든다면... 뻔한 노릇이지."
태영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미 산 아래로 내달리고 있었다. 성녀당을 향해, 백설화를 구하기 위해. 발밑의 돌부리에 몇 번이나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태영아, 같이 가!"
순돌이 헐떡이며 뒤를 따랐다.
뒤에서 마철웅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그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걸음은 놀랍도록 가볍고 빨랐다.
"어리석은 것들.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 생각이더냐."
마철웅이 혀를 찼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이미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허나... 저런 짓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산길을 내려가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 길게 늘어졌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성녀당에서는 낮게 깔린 주문 소리가 이미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으으으...'
그 소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밤공기를 타고 마을 전체로 스멀스멀 퍼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