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로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밤마다 천장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에 시달렸다. 그 넥타이는 뭘까. 윤태호 상무와의 '개인 미팅'은 뭘까. 향수 냄새는.
옆에서 서윤은 규칙적으로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몇 번이고 돌아누웠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조차 크게 느껴졌다. 혹시 내가 뒤척이는 걸 알아챌까 봐, 나는 숨을 죽이고 눈만 껌뻑였다.
서윤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물어봤다가 진실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니, 정확히는, 진실을 듣고 나면 이 완벽해 보이는 결혼생활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서윤은 회사를 물려받은 회장이었고,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나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뭐가 아쉬워서 저런 남자를, 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러웠고, 늘 눈치를 봤다.
"현우 씨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게 봐요?"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다정하게 들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하던 그녀의 눈빛이, 정말 걱정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 이제는 헷갈렸다.
나는 게임에 몰두하려 했다. 하지만 손이 자꾸 멈췄다. 컨트롤러를 쥔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화면 속 캐릭터가 벽에 부딫혀 죽어도 알아채지 못했다. 책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다섯 번이나 읽었는데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녀의 스케줄을 몰래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의 태블릿이 충전기에 꽂혀 있을 때마다, 나는 화면을 슬쩍 켜봤다. 비밀번호는 몰랐지만, 알림창에 뜨는 일정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오후 3시, 임원 회의. 오후 6시, 윤태호 상무 개인 면담. 그 이름이 며칠째 반복해서 등장했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밤에 그녀가 씻으러 들어가면,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의 휴대폰이 놓인 협탁을 힐끔거렸다. 화면이 켜질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확인하고 나면 늘 후회했다.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는데도, 뭔가를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일주일 뒤, 나는 결심했다.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매일 밤 잠을 설치고, 매일 낮 그녀의 눈치를 보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못하는 삶. 이대로라면 내가 먼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서윤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 나는 그녀의 개인 서재에 들어갔다. 평소엔 절대 들어가지 않는 공간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차가웠다. 문을 열기 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서재 안은 정갈했다. 책장에는 경영서와 법률서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창가에는 그녀가 아끼는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 익숙한 향, 그녀에게서 늘 나던 그 은은한 향수 냄새가 방 안 가득 배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를 맡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손끝이 떨렸다.
서랍은 잠겨 있지 않았다. 처음엔 안도했다. 숨길 게 없으니까 잠그지 않은 거겠지,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서랍을 완전히 당겨 열었을 때, 그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서랍 안에는, 낯선 남자의 사진이 몇 장 들어 있었다. 윤태호였다. 여러 각도에서 찍힌 사진들. 마치 감시하듯 찍은 사진들이었다. 어떤 사진은 회사 로비에서, 어떤 사진은 차 안에서, 어떤 사진은 그가 전혀 인식하지 못한 각도에서 찍혀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뭐지. 왜 이런 사진이 있지.
사진 밑에는 작은 메모지도 있었다. 날짜와 시간, 짧은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게 단순한 업무 자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손이 떨려서 사진을 제대로 들고 있기도 힘들었다.
그때,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삐빅-
서윤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였다.
나는 황급히 서랍을 닫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서재 문을 닫는 손이 후들거려서 문고리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로 몸을 던지듯 앉았다. 그리고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현우 씨, 집에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렸다.
"아, 네. 그냥... 책 좀 읽고 있었어요."
거짓말이 서툴렀다. 목소리가 떨렸다.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슬쩍 방향을 돌렸다.
서윤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손으로, 손에서 다시 얼굴로 옮겨갔다.
"얼굴이 안 좋아요."
"괜찮아요."
그녀가 다가와 내 뺨을 감쌌다. 차가운 손이었다. 밖에서 막 들어온 손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니요... 없어요."
"그래요."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웃음 뒤에 뭐가 있는지, 나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용기를 내서.
침대에 나란히 누워, 불을 끄기 직전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물을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서윤 씨. 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요?"
"윤태호 상무님이랑, 정말 아무 사이 아니에요?"
서윤이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순간 서늘하게 변했다.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낯선 냉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갑자기 왜 그래요?"
"그냥... 궁금해서요. 요즘 자주 늦으시고, 그 사람 이름이 자꾸 나오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서랍 속 사진 이야기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내가 그녀의 서재를 뒤졌다는 걸 알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았다.
"현우 씨."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나 믿어요, 안 믿어요?"
"믿어요. 믿는데..."
"그럼 됐어요."
그녀가 대화를 끊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누웠다. 그 등이 무슨 벽처럼 느껴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에서는, 뭔가가 계속 끓어올랐다. 잠들 때까지 나는 그 등을 바라보며, 서랍 속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왜 윤태호를 감시하듯 찍은 사진들을 갖고 있는 걸까. 그와 무슨 관계이길래.
***
다음 날, 서윤은 출장을 간다고 했다. 이틀간 지방에 내려가야 한다고.
아침 식탁에서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캐리어를 꺼내 왔다. 마치 어젯밤의 냉랭했던 대화는 없었던 일처럼, 그녀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녁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캐리어 바퀴가 현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이 닫히고,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 안이 텅 비었다. 평소보다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태블릿 알림창에서 짧은 메시지 하나를 봤다. 습관처럼 화면을 켜본 거였는데, 그 순간 알림이 떴다.
[윤태호: 회장님, 오늘 저녁에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윤: 좋아요. 우리 집으로 와요. 8시.]
우리 집.
몇 번이고 그 글자를 다시 읽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몇 번을 읽어도 같은 문장이었다.
그녀는 출장을 간다고 했다. 그런데 윤태호를 이 집으로 부른다고.
손이 떨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태블릿을 쥔 손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곧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다. 출장은 거짓말이었나. 아니면 정말 출장을 갔다가 몰래 돌아오는 걸까. 왜 하필 이 집으로, 왜 하필 내가 없을 시간에.
나는 그날 저녁, 원래 계획보다 훨씬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원래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취소했다. 뭐라고 핑계를 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나는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핏기가 없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7시 40분,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숨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조이는 듯한 익숙한 통증. 예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타나던 증상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천식 흡입기를 손에 꼭 쥐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침착하자고. 뭘 보게 되든, 침착하게 받아들이자고. 하지만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그 다짐은 점점 힘을 잃었다.
이제, 문을 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였다.
현관 앞에 서서,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