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90cm 아내는 살인자

5화

현관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손끝이 차가웠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늦은 시간이었다. 서윤에게 급한 서류를 전해주러 온 참이었다. 비서실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 집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평소라면 전화부터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냥, 발이 저절로 이곳까지 나를 데려왔다. 복도의 조명이 유난히 밝았다. 대리석 바닥에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 저택에 온 게 몇 번째인지 헤아려봤다. 결혼한 지 넉 달, 그동안 나는 이 집의 남편이면서도 늘 이방인 같았다. 서윤이 없을 때는 텅 빈 궁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고, 서윤이 있을 때는 숨이 막혔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의 목소리였다. 낮고, 차분했다. 평소 그녀가 회의를 주재할 때 쓰는 어조와 비슷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무적인 톤. "그렇게 조용히 죽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숨이 멎었다. 무슨 소리인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고 싶다니. 건드리다니.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각자 따로 떠다녔다. 조합이 되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얼어붙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뒷걸음질 쳐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문을 열었다. 딸깍. 거실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늘 그렇듯 은은한 디퓨저 향이 코끝에 스쳤다. 값비싼 가구들,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야경.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윤태호가 쓰러져 있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흰 대리석 바닥 위로 넓게 번지고 있었다. 검붉은 색이 조명 아래에서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마치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게 진짜일 리 없다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서윤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손에 든 나이프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가, 정적 속에서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벽을 짚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손톱이 저절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픈 줄도 몰랐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예상했던 일이 예상한 순서대로 벌어졌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일찍 왔네요." 그 말이,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싶었다. 지금 사람이 죽어 있는데. 지금 당신 손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는데. 그 말이 그렇게 태연하게 나올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서윤... 씨. 이게, 이게 뭐예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온몸이 떨렸다. 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보이는 그대로예요." 그녀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피 묻은 손으로. 나는 뒷걸음질 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현관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지 마세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스스로도 한심할 만큼 작았다. "현우 씨."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방금 사람을 죽인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오히려 나를 달래는 듯한 어조였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이 남자, 나를 협박했어요. 우리 집 안까지 들어와서, 계속 나를 만나달라고 했어요. 거절할수록 더 집요해졌고요." 말투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마치 지난 계약 건에 대해 보고하는 것 같은, 그런 무미건조함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내 걸 지키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피 냄새가 조금씩 짙어졌다. 비릿하고 무거운 냄새였다. 나는 숨을 얕게 쉬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 그 냄새가 더 깊이 들어올 것 같았다. "현우 씨, 도망갈 거예요?" 그 질문이, 이상하게 슬프게 들렸다. 마치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것 같았다. 혹은, 그 대답이 두려워서 묻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두려움과, 이상한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두려운 건 당연했다. 눈앞에 시체가 있고, 내 아내가 살인자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 이 집에서 뛰쳐나가야 한다는 생각, 온갖 이성적인 판단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 안도감은 왜 드는 걸까. 어쩌면,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저 남자를 죽였다는 말이, 마음 한구석을 이상하게 채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누군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뒤틀린 방식으로나마 나를 붙잡았다. 바닥의 핏자국을 다시 봤다. 넓게 퍼진 그 자국이, 조금씩 대리석 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왜 서윤을 협박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고... 할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균열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190센티미터의 완벽한 여자. 재벌그룹의 회장. 그리고 방금 사람을 죽인 살인자. 그 세 가지가 한 사람 안에 있다는 게,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봤던 서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메라 플래시 아래에서 완벽하게 미소 짓던 얼굴. 그 얼굴과 지금 눈앞의 얼굴이 겹쳐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얼굴이 진짜였을지도 몰랐다. "안... 할 거예요."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한 박자 늦게 자각했다. 시체가 눈앞에 있고, 신고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순간부터 나도 공범이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가면 뒤에 있던 무언가가, 아주 잠깐 드러난 것 같았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 옆에 있고 싶어요." 그 말이 진심인지, 두려움에서 나온 방어기제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도망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몸은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뿌리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피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팔에 닿은 그녀의 옷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사람을 죽인 직후인데도, 이 여자의 체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다가왔다. "고마워요, 현우 씨."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진심처럼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닿을 듯했다.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게 뛰고 있었다. "이제 당신도 나랑 같은 걸 봤네요." 등골이 서늘해졌다. 같은 걸 봤다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말에는 무언가 결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치 문턱을 넘어버렸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돌아갈 곳이 이제 없다는 통보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팔이 나를 감싼 채로, 점점 더 강하게 조여왔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신호가 몸 어딘가에서 울렸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윤의 팔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눈은, 여전히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갔다. 마치,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녀의 팔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