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름은 한도현. 여명 프로젝트 소속 3등급 전사였다.
여명 프로젝트는 정부가 만든 초능력자 육성 계획이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등급을 매기고, 전투에 내보내는 시스템이었다. 겉으로는 국가 안보를 위한 인재 양성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인간 병기를 찍어내는 공장이었다. 아이들은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 부모의 동의서 한 장과 함께 시설로 넘겨졌다. 동의서에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헌신"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문구를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그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는 기억나지 않았다. 시설의 벽지 색깔이 부모의 얼굴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났다. 회색과 흰색이 섞인, 이름조차 없는 색이었다. 그 색을 보면서 밥을 먹었고, 그 색을 보면서 훈련을 받았고, 그 색을 보면서 잠들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재능의 시작이, 하필이면 이런 곳이었다.
능력은 단순했다. 접촉한 것의 밀도를 순간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벽을 통과하고, 총알을 무르게 만들고, 필요하면 자기 몸의 밀도까지 낮춰 충격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상당히 쓸모 있는 능력이었다. 교관들도 처음엔 눈을 빛냈다. 전략적 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침투 작전에 특화된 재능이라고 떠들었다. 문제는 내가 그 능력을 써먹을 용기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용기가 없다는 건, 훈련장에서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능력의 등급은 위력이 아니라 실전 활용도로 매겨졌다. 나는 활용도가 없었다. 벽을 통과할 수 있었지만 통과한 자리에서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총알을 무르게 만들 수 있었지만, 총알이 날아오는 순간 이미 뒤돌아 뛰고 있었다. 재능은 있었고 담력은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잔인한 조합이 또 있을까.
동기들은 나를 겁쟁이라고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훈련장에서 나는 언제나 후열이었고, 실전에서는 언제나 뒷걸음질을 쳤다. 누군가는 내 등짝에 대놓고 "밥값이나 해라"라고 소리쳤고, 누군가는 그냥 나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후자가 더 편했다. 적어도 기대를 걸지 않았으니까.
지휘관들은 나를 3등급이라 불렀지만 사실 그건 예의였다. 진짜 등급은 없었다. 도망칠 구멍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만이 내 유일한 전략이었다. 훈련 평가서 어딘가에는 분명 "전투 가치 없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확인해본 적은 없다. 굳이 확인해서 내 자존감을 스스로 매장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날, 그 여자를 만났다.
이름은 차은비. 코드네임 자하. 여명 프로젝트에서 가장 강한 전사 중 하나였다. 불꽃을 다뤘고, 손끝에서 시작된 화염이 순식간에 건물 하나를 삼킬 수 있었다. 시설 내에서 그녀의 서열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교관들도 그녀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성격은 얼음보다 차가웠고, 표정은 늘 경직되어 있었다. 웃는 얼굴을 본 사람이 시설 안에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하는 나를 특히 혐오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겁쟁이가 자기 옆에서 숨 쉬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는 식이었다. 그녀에게 전장은 존엄이었다. 도망친다는 개념 자체가 그녀의 세계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 옆에 나 같은 인간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부조리한 인사 배치였을 것이다.
"넌 왜 여기 있는 거야."
자하가 물었다.
"살아있으니까."
내가 답했다.
"그게 이유가 돼?"
"안 되면 어쩔 건데."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지."
"맞아도 도망칠 건데."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끝났다. 자하는 나를 경멸했고, 나는 그 경멸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힘도 없었다. 가끔은 그녀가 정말로 손을 들어 올렸다가, 때릴 가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내리는 걸 본 적도 있다. 그게 더 아팠다. 맞는 것보다.
강함을 제압하는 건 더 강한 것이다. 나는 그 진리를 그녀를 통해 매일 배웠다. 배웠다고 해서 강해진 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매일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날 임무는 도심 한복판의 폭동 진압이었다. 반체제 조직이 실험 중이던 현실 조작 무기를 탈취해 시가지에서 폭주시킨 사건이었다. 현실 조작 무기는 여명 프로젝트 내에서도 금기시되는 물건이었다. 공간과 물질의 법칙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이론으로만 존재해야 했던 병기였다. 개발 단계에서만 세 번의 시설 붕괴 사고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은 대개 축소되어 돌아다닌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을 거라고, 나는 늘 짐작하고 있었다.
출동 명령이 떨어졌을 때, 상황실 화면에는 시가지 한 블록이 통째로 일그러진 영상이 떠 있었다. 건물의 창문들이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휘어 보였다. 지휘관은 그 영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게 아직 초기 단계"라고 말했다. 초기 단계라는 말이 그렇게 무섭게 들린 적은 없었다.
자하가 선두에 섰고, 나는 후열에 섰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출동 직전까지도 나를 흘긋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네가 있어봤자 뭘 하겠냐"는 문장이 압축되어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알아들었고,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전투는 삼십 분도 못 가 붕괴됐다. 반체제 조직의 무기가 예상보다 훨씬 불안정했던 탓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화력 대응이었다. 자하가 화염으로 조직원들을 밀어붙였고, 다른 전사들이 측면을 봉쇄했다. 나는 뒤에서 벽 하나를 통과해 도주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무기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조직원 중 하나가 겁에 질려 무기의 안전장치를 강제로 풀어버린 게 원인이었다. 공간이 접히고 펴지는 것을 눈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종이를 구겼다가 다시 펴는 느낌이었는데, 그 종이가 건물이고 사람이었다. 건물이 반쪼가리로 사라지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그냥 없어졌다. 소리조차 없었다. 비명도 없었다. 그냥 있던 것이 없어졌다.
자하는 불길로 무기를 억제하려 했다.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무기 주변의 공간을 태워 안정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는 것.
"도현! 뒤에서 받쳐!"
자하가 소리쳤다.
그 순간 나는 뒤돌았다.
이 대목에서 굳이 미화하지 않겠다. 나는 도망쳤다. 동료를 버리고, 임무를 버리고, 등 뒤에서 자하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뛰었다. 발이 먼저 움직였고, 머리는 나중에 따라왔다. 겁쟁이는 결국 겁쟁이였다. 몇 걸음 뛰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자하의 얼굴이 보였다. 경멸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중에야 그게 실망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무기가 터졌다.
폭발은 소리가 없었다. 빛도 없었다. 그냥 세상이 한 번 접혔다가 펴지는 감각이었다. 발밑의 아스팔트가 순간적으로 액체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굳는 걸 봤다. 시야 끝에서 건물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걸 봤다.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 짧았다.
나는 그 파동의 끝자락에 걸렸다. 자하도 걸렸다. 정확히는, 자하가 나를 붙잡으려 뛰어든 그 순간에 둘 다 걸렸다. 그녀는 도망치는 나를 구하러 뛰어온 거였다. 이 아이러니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 겁쟁이 자식아!"
그녀가 외친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이 욕인지 안부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화가 나면서도 걱정할 수 있다. 인간이 그럴 때가 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나는 두 가지를 봤다. 하나는 자하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는 것. 손끝에서 아직 남은 열기가 손목을 태울 듯 뜨거웠던 것도 함께 기억한다. 다른 하나는 내 몸이 밀도를 잃고 허공으로 풀려나가는 감각이었다. 뼈와 살이 물처럼 흩어지는 느낌인데,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능력이, 도망치던 그 순간에 처음으로 완벽하게 작동했다.
평생 그 능력으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에야 완벽하게 발현됐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그다음은 어둠이었다. 아주 긴 어둠이었다. 소리도 없고 시간도 없는, 그냥 존재만 남은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딱 한 번 자하의 손을 다시 느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일 거라고는, 그 순간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겁쟁이의 마지막 도주가 이런 결과를 낳을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의식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 다른 하늘을 본 것 같았다. 원래 알던 하늘과는 색이 달랐다. 그게 착시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한 신호였는지는, 그때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