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낯선 몸에 숨은 전사

5화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이 저택의 리듬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아침은 늘 오순희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가위질 소리, 물주는 소리, 낮은 콧노래 소리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면 그게 곧 기상 알람이었다. 낮에는 다인이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올 때마다 옷깃에서 다른 냄새가 났다. 어느 날은 커피, 어느 날은 소독약, 어느 날은 아예 낯선 향수 냄새였다. 저녁이면 태경은 서재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문 밑으로 스며나오는 불빛만이 그 여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재희는 하루 종일 뭔가를 훈련하듣 몸을 움직였다. 아침엔 마당에서, 오후엔 지하 어딘가에서, 저녁엔 다시 마당에서. 무엇을 훈련하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빈은 정반대였다.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다가 밥때만 되면 유령처럼 나타났고, 밥을 먹고 나면 다시 방으로 사라졌다. 세 자매의 리듬이 이렇게나 다른데도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신기했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톱니바퀴들이 억지로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도 있는 법이다. 이 집이 딱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인이 서재로 나를 불렀다. 서재는 태경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다인도 열쇠를 갖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위에 병원에서 가져온 서류 봉투가 펼쳐져 있었다.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다. 서지안의 몸, 정확히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몸의 흉터들을 찍은 것들이었다. 손목, 팔 안쪽, 등. 각도별로 세심하게, 마치 증거물을 채증하듯 찍혀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겪었을 일이 사진 한 장 한 장에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는 이 몸에 무슨 짓을 했고,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은 채 나에게 넘어와 있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병원에서 받았어. 정식으로는 못 받는 자료인데, 우리 집이 그런 데는 좀 세거든." 다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해.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확인이요." "응. 확인." 다인은 대답 대신 사진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등 위쪽, 어깨뼈 아래 자리에 있는 작은 흉터였다. 자세히 보면 그냥 흉터가 아니었다. 정확한 원형에 가까운 모양이었고, 그 안에 미세하게 갈라진 선들이 방사형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그 모양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여명 프로젝트 시설의 낙인들과 비슷했다. 손끝이 저절로 차가워졌다. "이거 낙인이야." 다인이 말했다. "정부 시설에서 쓰는 표식이랑 비슷해. 근데 여기 정부는 그런 걸 쓴 적이 없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공식적으로는." "비공식적인 건 늘 있잖아." 다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계는 어디나 그래."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세계의 정부가 아니라, 내가 원래 있던 세계, 여명 프로젝트의 표식과 닮았다면. 그건 서지안이 나와 같은 세계에서 왔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 세계에도 비슷한 무언가가 이미 존재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이런 표식, 본 적 있어?" 다인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시선에는 순수한 걱정과, 동시에 아주 미세한 계산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한다. 동시에 나를 조사하고 있다. 둘 다 진심이라는 게 더 무서웠다. 사람은 원래 두 가지를 동시에 진심으로 품을 수 있는 종족이다. 문제는 그 두 진심이 서로 부딪힐 때다.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방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나는 이 집에서 살아온 시간을 통째로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럴 준비는 아직 없었다. 다인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정리하며 화제를 돌렸다. 마치 처음부터 이 대화가 여기까지만 진행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매끄럽게.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우리 가문 행사가 있어. 매년 여는 건데, 명진시에서 좀 이름 있는 가문들이 다 모여. 너도 같이 가." "제가요? 저는 그냥…" 나는 말을 흐렸다. "내가 데려간다고 했어. 언니도 승낙했고." 다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마. 그냥 옆에 있어주면 돼." "그냥 옆에 있어주면 된다는 말, 믿어도 돼요?" "안 믿어도 돼. 어차피 데려갈 거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태경이 승낙했다는 것. 그 냉철한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신원 미상의 여자를 가문 행사에 데려가게 허락할 리 없었다.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 앞에 나를 세워두고 반응을 보려는 걸까. 아니면 더 큰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걸까. 낙인의 정체를 확인하는 방법이 병원 서류뿐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걱정해주는 손과 조사하는 손이 같은 사람의 것일 때가 많다. ───── 그날 밤, 나는 창가에 앉아 밀도 조작 능력을 아주 조금 시험해봤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문은 잠겨 있었다. 그래야 안심이 됐다. 손끝으로 유리컵 표면을 살짝 만졌다. 밀도가 낮아지며 컵이 순간 흐물흐물해졌다가, 손을 떼자 다시 단단해졌다. 다시, 조금 더 세게. 컵의 벽이 물처럼 일렁이더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능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몸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그 사실이 위로가 될지 위협이 될지, 나는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능력이 살아 있다는 건 내가 여전히 나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언제든 누군가에게 들킬 수 있는 흔적이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다빈이었다. "언니, 뭐해?" 다빈이 아무렇지 않게 방에 들어왔다. 문은 잠겨 있었는데, 이 집 애들은 열쇠를 몇 개씩 갖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순간 얼음이 됐다. 유리컵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아, 아무것도." "방금 뭐 이상한 거 봤는데." 다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컵이 좀 이상하게 움직인 것 같은데." "착각이야." "진짜? 나 눈 좋은데." "눈이 좋아서 착각을 잘하나 보지."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얼굴은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했다. 다빈은 잠깐 나를 의심스럽게 보다가, 이내 관심을 잃은 듯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번 주말 행사에 언니도 온대? 재밌겠다. 나 새 드레스 샀어." "드레스?" "응, 완전 예쁜 거. 다인 언니가 사줬어. 근데 색이 좀 애매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색인데." "보면 알아. 나중에 보여줄게." 나는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며 대충 맞장구를 쳤다. 다빈이 신나게 자기 드레스 자랑을 늘어놓는 동안 — 신발이 얼마였는지, 구두 굽이 몇 센티인지, 액세서리는 어떤 걸로 맞출 건지 — 나는 등 뒤에 숨긴 유리컵을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손이 살짝 떨렸지만 다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남의 손끝 같은 건 보지 않는다. "근데 재희 언니는 그런 행사 싫어하지 않아?" 다빈이 문득 물었다. "몰라. 안 물어봤어." "태경 언니가 가라고 하면 어차피 가야 돼. 우리 집은 그런 식이야."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태경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하는 집. 그 위계의 정점에 있는 여자가, 나 같은 외부인을 자기 집안 행사에 순순히 들여보낸다는 것. 다빈은 별생각 없이 던진 정보였겠지만, 나에게는 퍼즐 조각이었다. 다빈이 나가고 나서, 나는 그 컵을 다시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 능력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다빈처럼 눈치 빠른 애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언젠가 반드시 들킬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의 표식이 정말 여명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됐을까. 어딘가에 살아 있을까.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까. 만약 살아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몸을 빌려 살고 있는 도둑인 걸까. 답이 없는 질문들이었다. 답이 없는 질문은 늘 밤에 더 크게 자란다. 나는 창밖 옅은 자주색 노을을 오래 바라봤다. 이 세계의 하늘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돌아갈 길을 서서히 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진시의 이름 있는 가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다인은 나를 그 자리에 세워두고 무언가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태경은 그것을 알면서도 승낙했다. 두 여자의 계산이 어디서 어떻게 겹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번 주말, 나는 더 이상 이 저택 안에서만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 몸에 새겨진 낙인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것. 그 사람이 적일지, 또 다른 진실을 쥔 사람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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