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소녀 감금 시나리오

3화

며칠 뒤 등굣길이었다. 하늘이 유난히 흐렸다.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공기에는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산을 챙겨 나올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나왔다. 어차피 버스 정류장까지는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으니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막 가방을 고쳐 멜 때였다. 낯선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스르륵 멈춰 섰다. 검은색 세단이었다.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갔다. 익숙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타. 학교까지 태워줄게." 강예린이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유명한 애. 성적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다는 얘기가 은근히 돌던 애. 선생님들도 예뻐하고, 남자애들도 좋아하고, 여자애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애. 그런 애가 갑자기 내 앞에 차를 세우고 웃고 있었다. "괜찮아. 걸어갈게." "비 오잖아." 실제로 하늘이 흐리긴 했다. 아직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곧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되진 않았다. "그냥, 걸어가는 게 편해." 솔직히 말하면 그 차에 타는 게 불편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강예린이라는 애 자체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반에서 유일하게 나만 그 애한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그 애의 시선을 끌었던 걸까. 그녀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마치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조금 이상했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래. 그럼 이거라도 마시고 가." 창문 밖으로 캔음료 하나를 내밀었다. 손끝이 하얗고 가느다랬다. 손톱 끝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절하기가 애매했다. 이미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 또 거절하면 예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마지못해 받았다. "고마워." "응. 조심히 가." 그녀는 다시 창문을 올렸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나는 캔음료를 손에 든 채로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이상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목이 말랐다. 걸어오는 동안 몸이 더워졌고, 정류장에서부터 학교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다. 결국 그 음료를 마셨다. 조금 씁쓸한 맛이 났다. 흔히 마시던 음료랑은 조금 다른 맛이었는데, 그냥 새로 나온 제품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무거워졌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자리에 앉았던 것도.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뭉개졌다. 선생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고, 옆자리 애가 뭐라고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했다.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다. 그리고, 어둠. *** 눈을 떴을 때,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였다. 하얀 벽지, 은은한 조명, 침대 하나, 옷장 하나. 방 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위해 준비해 둔 것처럼, 필요한 것들만 딱 맞게 놓여 있었다. 창문은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는데 손목에 뭔가 걸렸다. 부드러운 재질의 끈이 묶여 있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몇 번을 당겨봐도 끈은 팽팽하게 버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교실에 있었는데. 분명히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선생님의 목소리와 눈꺼풀이 무거워지던 감각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벽에는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시계도 없었다. 시간을 알 수 있는 그 무엇도 이 방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목이 타는 것처럼 말라서, 침을 삼켰지만 삼켜지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붙였다. 등이 벽에 닿았다. 문이 완전히 열리고,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강예린이었다. 교복이 아니라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곱게 풀려서 어깨 위로 내려와 있었다. 학교에서 보던 그 모습과는 다르게, 낯설게 예뻤다. 화장을 한 것도 아닌데 피부가 유독 하얗게 빛나 보였다. "깼구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기는 듯한 어조였다. "여기가 어디야." 목이 잠겨서 잘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내 방. 아니, 이제 우리 방이라고 해야겠다." 숨이 막혔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장난스러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이거 풀어줘. 나 집에 가야 돼." 목소리에 힘을 담으려 했지만, 떨림이 그대로 새어 나왔다. "안 돼."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침대 옆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그녀의 무게로 살짝 눌렸다.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나는 그 손을 피하려 했지만, 묶인 손목 때문에 몸이 크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드디어. 드디어 너를 여기 데려왔어." 말투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오래 기다려온 것을 손에 넣은 사람 같은, 만족스러운 어조였다. "장난치는 거지?" "장난 아니야." 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 학교에서 보던 그 밝은 웃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동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무시한 첫 사람이었어. 유일한 사람이었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들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다들 나를 좋아한다고 하고, 나를 특별하게 대해. 그런데 너는 안 그랬어.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봤어. 그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알아?" "나는... 그냥 관심이 없었을 뿐이야."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그래. 그게 좋았던 거야." 그녀가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 예뻤지만, 그 웃음 안에 담긴 것은 결코 온전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놓칠 순 없잖아." "이거 범죄야. 알아?" 목소리가 커졌다. 손목의 끈이 다시 당겨졌지만 풀리지 않았다. "알아. 근데 상관없어." 그녀가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밖에서는 아무도 몰라. 강예린이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해. 나는 완벽하니까." 완벽하니까, 라는 말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우리 반 애들도, 선생님들도, 우리 부모님도. 다들 내가 항상 웃고 있고, 다 잘하고, 아무 문제 없는 애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으니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목이 묶여 있는 채로 손을 억지로 쥐었더니 손톱이 살을 눌렀다. 아팠지만, 그 통증이 오히려 현실감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제발, 나 좀 보내줘." 목소리가 떨렸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일어섰다. 원피스 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밥 갖다줄게. 배고프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정한 말투였다. 그 다정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강예린, 제발..." "금방 올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철컥. 잠금장치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도 학교에 가는 길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갇혀 있었다. 그것도 반에서 가장 유명한, 완벽하다고 불리던 그 애의 방 안에. 손목의 끈을 다시 당겨봤다.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손목 주변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창문 없는 방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둠과 침묵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인지 욕실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방 바깥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주인은, 지금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누군가 나를 찾고 있을까. 엄마는 지금쯤 학교에 전화를 걸었을까. 아니면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문이 열리기 전까지,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소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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