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쿵.
현관 쪽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저절로 쪼그라들었다. 손목에 묶인 끈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잊고, 나는 숨을 죽였다.
예린이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단호했다. 예린과는 다른 종류의 목소리.
"예린아, 방에 누구 있니? 저번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던데."
숨이 턱 막혔다.
누군가 알고 있었다. 이 집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집의 다른 방들을 오가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야, 엄마. 그냥 라디오였어."
예린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나는 그 목소리의 온도 차를 안다. 저건 거짓말할 때 나오는 목소리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또각, 또각. 카펫 위를 걷는데도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문 손잡이가 움직였다. 달칵.
"엄마, 잠깐만!"
예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그래?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쾅.
중년 여성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천천히 방을 훑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손목의 끈을 발견한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핏기가 순식간에 가시는 걸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게... 이게 뭐야."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예린이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마치 나를, 아니 이 상황 전체를 가리려는 듯이.
"엄마, 내가 다 설명할게."
"설명? 이게 설명할 일이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보다 훨씬 크게.
"너 지금 사람을 가둬놓은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
예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완벽하던 미소가, 그 완벽하게 만들어진 얼굴이, 처음으로 완전히 깨졌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두려움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엄마... 나 그냥, 나 좀 봐달라고... 서준이만 있으면 됐는데..."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완벽한 학교 아이돌이 아니라, 그냥 엄마에게 혼나는 어린 딸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몇 번이나 반복했다. 뭐라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진동 소리가 아니라 벨소리였다. 그 소리가 방 안의 무거운 침묵을 가르며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요? 아... 알겠습니다. 바로 내려갈게요."
짧은 통화였다. 통화가 끝나자 어머니의 얼굴이 더 굳었다. 방금 전의 충격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손님들 오셨대. 지금 당장 내려가야 해."
집안의 다른 일이 그녀를 다시 불러냈다. 이 순간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이 집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예린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이따 다시 얘기해. 절대 이 방에서 나오지 마."
그 말을 남기고 어머니가 서둘러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문이 열려 있었다.
예린은 문 앞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완벽한 아이돌의 얼굴이 아니라, 무너진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이었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손목의 끈을 힘껏 비틀었다.
끈이 침대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손목을 돌리고, 당기고, 다시 돌렸다. 손등이 쓸려 피가 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살갗이 벗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따가움보다 조급함이 먼저였다.
끈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마침내 끈이 풀렸다.
손목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조용히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발끝을 세우고, 소리 내지 않으려 애썼다.
예린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문을 향해 발을 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문틀에 손이 닿았다.
그 순간, 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다시 멈췄다.
"...서준아?"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방금까지 흐느끼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톤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예상했다는 듯한, 혹은 받아들였다는 듯한 그런 조용함.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뛰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발이 계단에 걸릴 뻔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뒤에서 그녀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서준아! 가지 마! 제발!"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애원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넓은 홀이 보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대리석 바닥. 이 집의 부유함이 한눈에 느껴졌지만 그런 걸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낯선 골목이었다. 어느 동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높은 담벼락들, 낯선 가로등, 낯선 나무들.
무작정 뛰었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닿는 감각조차 낯설었다.
한참을 달리다 숨이 차서 멈춰 섰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거리, 낯선 간판들.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휴대폰은 압수당한 채였다. 도움을 청할 곳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주택가였다.
손등의 상처가 그제야 아프게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상처를 내려다보니 피가 마른 채 굳어 있었다.
벗어났다는 안도감보다, 더 큰 불안이 밀려왔다.
강예린의 어머니가 방금 목격한 걸 그냥 넘길 리 없었다. 그 하얗게 질린 얼굴, 그 떨리는 목소리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저 집안이라면, 그 정도의 재력과 인맥이라면, 이 일을 조용히 덮으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린은—
방금 그 눈빛이 떠올랐다. 흐느끼다가 나를 부르던, 그 이상하게 조용한 목소리. 마치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오히려 침착한 그 얼굴.
포기한 게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멈춰 있을 순 없었다. 이 동네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골목을 몇 개나 지났는지 몰랐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저편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낯익은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