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소하는 곡괭이를 놓쳤다.
손이 떨려서였다.
쨍- 하는 소리가 갱도 벽에 부딪혀 울렸다.
"뭐라고?"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흘째 눈을 감고 있는 민재 옆에서, 그녀는 이미 어떤 말도 기대하지 않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손이요. 방금 움직였어요." 미정이 다시 말했다.
소녀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으나, 그 확신조차 믿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민재의 몸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소하는 그것이 미정의 착각이라 여기고 다시 곡괭이를 들었다.
갱도 안에서 헛된 희망은 사치였다.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는 노예는 없었다.
그때 민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민재야?" 소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가슴이, 아주 미약하게 오르내렸다.
소하는 그 오르내림을 보고서도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착각이라면, 지금 이 순간 무너지는 것은 그녀 자신이 될 것이었다.
그 순간 민재의 시야 속에서 세상이 다르게 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글자들이 떠올랐다.
[개체 인식: 강민준(민재)]
[생명 반응: 위독]
[시스템 초기화 - 조건 충족]
[재기동합니다]
낯선 글자였으나,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강민준.
그것이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는 사실이, 무너진 몸 어딘가에서부터 확신처럼 차올랐다.
대학 강의실, 늦은 밤 편의점 알바, 자취방 좁은 침대. 파편 같던 기억들이 순서 없이 쏟아졌다.
강의실 맨 뒷줄, 졸음을 참으며 필기하던 손.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진상 손님에게 고개를 숙이던 순간. 좁은 방 안, 이불 한 장으로 겨우 버티던 겨울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던 삶의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는, 트럭 한 대가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는 것. 그 다음은 없었다.
'죽었었구나. 원래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은 이상하게도 차분했다. 두 번째 죽음이라는 걸 실감하기엔, 첫 번째 죽음의 기억조차 방금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슬픔이 자리 잡기도 전에 다음 정보가 밀려들었다. 감정을 붙잡고 있을 틈조차 시스템은 주지 않았다.
[생명 반응 회복 중...]
[상태: 민재(18) / 노예 등급 / 신체 손상 심각]
[특성 부여: 斗气诀 - 감정을 연소하여 두기(斗气)로 전환한다]
글자들이 눈앞을 스쳐가는 동안 민재는 몸속 어딘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훅-
가슴 한복판에서부터 열기가 퍼져나갔다.
소하의 눈물, 미정의 두려움, 갱도 안 노예들의 무관심, 곽리의 웃음.
그 모든 감정이 마치 연료처럼 몸 안으로 빨려드는 감각이었다.
낯설었으나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몸 어딘가가 오래 굶주려 있었던 것처럼, 그 열기를 반겼다.
"...소하야." 민재가 눈을 떴다.
소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민재야! 정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의 몸을 다시 끌어안았다.
이번엔 슬픔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그녀를 채웠다. 안도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격렬한 무언가였다.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부서질 듯 여윈 몸이었는데도, 놓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그녀를 움직였다.
"어떻게..." 미정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소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갱도에서 죽은 사람이 눈을 뜨는 일은, 그녀가 아는 세상의 규칙에는 없었다.
"저도 몰라요." 민재가 낮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몸 안에 새겨진 낯선 체계,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직 몰랐다.
+++
민재는 사흘을 앓았다.
갱도 구석, 정리반의 눈을 피해 소하가 숨겨둔 자리였다.
돌벽 틈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상처 난 몸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흘 동안 그는 조용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강민준(민재)
레벨: 1
체력: 32/120
특성: 斗气诀 (감정 연소 - 흡수한 감정의 강도에 따라 두기 축적)
스킬: 없음
'게임이잖아, 이거.'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현대에서 즐기던 온라인 게임과 비슷한 체계였다. 다만 여기서는 죽으면 실제로 죽는다는 차이가 있었다.
숫자로 표시된 체력, 레벨이라는 개념. 익숙한 형태였으나 익숙함이 안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익숙한 규칙 속에 낯선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삶을 되짚었다.
노예로 태어난 건 아니었다. 원래 이 세계의 '민재'라는 아이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마족 상인에게 팔려온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그 아이의 몸에, 죽은 강민준의 의식이 어느 순간부터 겹쳐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부터 두 존재는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것.
민재로서 겪었던 매질과 굶주림의 기억도, 강민준으로서 겪었던 트럭 앞의 순간도, 이제는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둘 다 그의 것이었다.
'복수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곽리에게, 그리고 이 지옥 같은 흑철광산 전체에.
매질하던 손, 채찍이 지나갈 때마다 웃던 얼굴. 그 웃음을 잊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몸은 여전히 노예였고, 힘은 레벨 1짜리 숫자에 불과했다.
'급하게 움직이면 죽는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회사에서든, 게임에서든, 조급함은 늘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봐?" 소하가 다가와 물었다.
그의 눈앞에 뜬 창을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민재가 말했다.
"몸은 괜찮아?" 소하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이상하게, 그날보다 더 튼튼해진 것 같아요." 민재가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실제로 그랬다. 상처는 아물었고, 몸에는 전에 없던 활력이 감돌았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도 안심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걸 눈으로 보고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곽리는요?" 민재가 낮게 물었다.
"매일 순찰 돌아요. 당신이 죽었다는 걸 알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말끝이 흔들렸다. 정리반에게 시체가 사라진 노예는, 도망친 노예와 똑같이 취급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가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안 돼요." 민재가 말했다.
"당분간은요."
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는 갱도의 다른 노예들에게 입을 맞춰둔 상태였다. 민재는 열병을 앓느라 구석에 누워 있는 것으로.
민재는 이제 이 광산을 벗어날 계획을 세워야 했다.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소하와 미정, 그리고 이 갱도 안의 누군가는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걸.
곽리의 눈을 피해, 정리반의 순찰을 피해, 몸이 회복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 모든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기 전에, 그는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 광산을 관리하는 마족 행정관에게, 정식으로 방면을 청원할 수 있는지.
노예 신분이라도, 법적으로는 그런 절차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갱도 안에서 떠돌던 소문이었다. 누군가는 실제로 방면을 받았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헛된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도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죽은 자에게 두 번째 기회가 온 이상,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는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다음 날, 순찰조가 교체되는 짧은 시간을 틈타 민재는 갱도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이 아직 온전치 않았으나, 지금이 아니면 다음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행정관의 처소는 광산 입구 옆, 돌로 지은 낮은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창을 든 경비 두 명이 서 있었다. 갑옷은 낡았고, 표정에는 지루함이 배어 있었다.
"뭐야, 노예 놈이." 경비 하나가 그를 막았다.
창끝이 민재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행정관님을 뵈러 왔습니다." 민재가 말했다.
존댓말이었으나 위축된 기색은 없었다.
경비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미친놈이네." 다른 경비가 킬킬거렸다.
"노예 신분으로 행정관을 뵙겠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처음 말한 경비가 창을 다시 겨누며 물었다.
말투에는 조롱이 짙게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