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사이 민재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노예처럼 행동했다.
곡괭이를 들고, 할당량을 채우고, 매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도 어깨도 예전과 똑같이 굽어 있었다. 감시자의 눈에는 그저 순종적인 노예 한 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갱도는 낮에도 어두웠지만 밤에는 아예 칠흑이었다.
횃불 몇 개만이 벽을 따라 흔들렸고, 그 그림자 속에서 노예들은 몸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민재는 그 그림자를 이용했다.
갱도에는 늙은 노예들이 많았다.
오래 산 자들일수록 이 광산의 구조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몸으로 익힌 자들이었고, 살아남는 법이란 곧 정보였다.
민재는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곽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민재가 물었다.
"그놈? 오 년 전인가." 늙은 노예가 낮게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오래된 피로가 섞여 있었다.
"원래 저급 수인 출신이었다지. 노예였다가 마족한테 충성을 바쳐서 지금 자리를 얻은 거야."
"충성이라뇨." 민재가 되물었다.
"자기 동족 노예 반란을 밀고했다더군. 그 공으로 감시대장 자리를 얻은 거지." 늙은 노예가 침을 뱉었다. 침은 갱도 바닥의 먼지 위에서 검게 퍼졌다.
"그러니 지금도 노예를 못 죽여서 안달인 게야. 자기가 노예였다는 걸 지우고 싶은 거지."
민재는 그 말을 곱씹었다.
'노예가 노예를 짓밟아야만 안전하다고 믿는 자.' 그런 심리라면, 곽리가 자신에게 유독 잔인했던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그는 아마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지우고 싶은 흔적을.
다음 날 밤에는 다른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팔뚝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는 노인이었다. 곡괭이질을 오래 한 손이었다.
"어르신, 곽리 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민재가 조용히 물었다.
노인은 잠시 그를 훑어봤다. 캐물어도 되는 놈인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위험한 걸 묻는구나." 노인이 말했다.
"알아야 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민재가 말했다.
노인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곽리의 배후에 있는 건 행정관 가라한만이 아니었다.
이 흑철광산은 더 큰 조직, '마족 채굴청'이라는 상급 기관의 관리 아래 있었다.
채굴청은 이 지역 전체의 광산과 노예 노동력을 관리하며, 채굴량에 따라 감시자들에게 보상을 내렸다.
"보상이요?" 민재가 물었다.
"돈이지. 노예 목숨값보다 채굴한 광석값이 더 쳐준다는 소리야." 정보를 전해준 중년 노예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 곽리 같은 놈들은 노예 하나 죽는 거보다 할당량 못 채우는 걸 더 무서워해. 죽은 놈 대신 산 놈을 더 쥐어짜면 되니까."
"그럼 왜 저는 죽이려 든 거죠. 저를 죽이면 할당량은 더 못 채울 텐데." 민재가 물었다.
"넌 예외야." 중년 노예가 목소리를 낮췄다.
"넌 이미 명부에서 지워졌던 놈이니까. 존재 자체가 곽리한테는 증거인 셈이지. 자기가 실패했다는 증거."
민재는 이 정보들을 조각조각 맞춰나갔다.
곽리는 결국 채굴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말단 부속품이었다.
그를 벌하는 건 이 광산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행정관도, 채굴청도, 노예의 목숨보다 광석의 무게를 우선시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정의를 구한다는 건,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정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 민재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구해야 할 건 이곳을 벗어날 길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붙잡고 있는 건 용기가 아니라 미련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골라라.'
어릴 적엔 그 말이 겁쟁이의 변명처럼 들렸다. 지금은 그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소하와 미정을 데리고 광산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복수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탈출은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민재는 상태창을 다시 열어보았다.
[레벨: 1]
[체력: 118/120]
[특성: 斗气诀]
[획득 조건 미달로 스킬 없음]
'뭔가 얻으려면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그는 그렇게 짐작했다.
감정을 연소해 두기로 전환한다는 특성.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해야 스킬을 얻는지는 창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는 창을 이리저리 눌러봤다. 뭔가 더 나올까 싶었지만, 창은 요지부동이었다.
'조건이란 게 뭘까. 감정의 양일까, 아니면 특정한 상황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그날 밤, 민재는 소하와 미정에게 계획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셋은 갱도 구석, 감시등의 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 모였다.
"광산을 나갈 방법을 찾고 있어요." 민재가 낮게 말했다.
"어떻게요? 여긴 사방이 감시자예요." 소하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불안이 배어 있었다.
"채굴한 광석을 실어 나르는 마차가 있죠. 그게 나가는 통로를 이용할 거예요." 민재가 말했다.
"그 통로도 지키는 놈들이 있을 텐데요." 미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있겠죠. 하지만 사람 수는 갱도 안보다 적을 거예요. 마차가 나갈 때 광석 무게만 확인하고, 사람은 대충 세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민재가 말했다.
"위험해요. 걸리면..." 소하가 말을 멈췄다.
"걸리면 죽겠죠. 하지만 여기 계속 있어도 언젠가 죽어요." 민재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소하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손이 미정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어떻게든." 그녀가 말했다.
미정도 소하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미정이 짧게 말했다. 짧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
민재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 다짐이 몸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무게를 늘려가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계획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순찰 시간, 곽리가 갱도 깊은 곳으로 내려왔다.
평소와 다른 걸음이었다. 목적이 있는 걸음.
날개를 접은 채 걷는 그의 발소리가 갱도 벽에 부딪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민재." 곽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재의 몸이 굳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구나.' 그는 즉시 알아챘다.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아니, 그 이상을 알아챈 거다.'
곽리의 표정에는 분명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평소의 조롱기 섞인 웃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차가운 눈빛만 남아 있었다.
"명부에 아직 네 이름이 있더군. 그런데 넌 죽었지." 곽리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 손으로 죽였는데."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서 있는 거지?"
주변 노예들이 하나둘 곡괭이질을 멈췄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감시대장이 이렇게 직접 캐묻는 건 처음이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은 없어야 정상이야." 곽리가 다가섰다.
그의 날개가 스산하게 펼쳐졌다.
스르릉-
"행정관한테 청원까지 했다지? 소식이 빠르더군. 채굴청 쪽에서 연락이 왔거든."
민재는 그제야 깨달았다.
가라한이 그 청원 내용을 채굴청, 혹은 곽리 본인에게 흘렸다는 것을.
행정관에게 기댈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확실해진 셈이었다.
'애초에 기댈 곳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 사실을 각인시켰다.
"뭘 캐고 다녔는지 다 들었다. 내 뒤를 파고, 채굴청 구조를 알아보고." 곽리가 채찍을 손에 감았다.
"노예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나?"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상황은 명백했다.
곽리는 오늘, 그를 이곳에서 완전히 끝내려는 것이다.
말로 캐묻는 건 형식일 뿐, 답을 듣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늘은 채찍이 아니다." 곽리가 말했다.
허리춤에서 짧은 곡도를 뽑아 들었다.
스릉-
칼날이 횃불 빛을 받아 흐릿하게 번뜩였다.
"두 번 살아나지 못하게, 확실히 해두려고."
주변 노예들이 뒷걸음질쳤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나선다는 것은 곧 함께 죽는다는 뜻이었으니까.
소하가 민재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곽리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몸이 굳었다.
"넌 빠져 있어. 이건 저놈과 나 사이의 일이니까." 곽리가 말했다.
민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갱도 벽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좁은 갱도 통로, 위로는 무너지기 쉬운 낡은 지지대들, 옆으로는 곡괭이와 삽 몇 자루뿐.
어느 것도 곡도를 든 마족을 상대할 무기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퇴로가 없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 판단과 동시에, 몸속 어딘가에서 낯선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하의 두려움, 미정의 떨림, 주변 노예들의 숨죽인 공포. 그 모든 감정이 마치 자석처럼 그의 안으로 빨려들었다.
피부 아래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처음 겪는 감각이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몸 안에 있던 것이 이제야 깨어나는 것 같았다.
[감정 흡수 감지]
[斗气 축적: 12%]
곽리가 곡도를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자, 이번엔 몇 번째 매질에 기절하려나." 그가 웃었다.
비웃음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 자리에서 끝날 승부라는 확신.
민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그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곽리의 곡도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