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었다고 벌 받았어

2화

다음 날, 나는 뒤뜰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제 일은 그저 우연이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백랑족 아이가 무녀 따위에게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아침부터 몇 번이나 다짐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냥 교실에 남아 있자고. 도시락도 필요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종이 울리자마자 내 발은 이미 복도를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가지 말자고 외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규칙을 어긴 자에게는 자비가 없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그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온실 뒤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도현이었다.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얼굴 둘이 더 있었다. 갈색 머리 소년과 금빛 머리 소년.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셋이었다. 어제는 도현 혼자였는데, 오늘은 셋이었다. "어, 왔다." 갈색 머리 소년이 손을 흔들었다.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나 박준영. 얘는 오태민." 태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백랑족 셋이 나를 둘러싼 모양새였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인사를 해야 하나.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 도현이 손짓했다. 짧고 명령 같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듯 앉았다. 치마 자락을 정리하는 손끝이 떨렸다. 세 사람 모두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신기한 걸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근데 너, 월궁회 소속이지." 준영이 대뜸 물었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이 막혔다. 어떻게 알았을까. 얼굴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게··· 그러니까···." 말을 더듬는 나를 보며 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숨길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끼리만 아는 거니까." "우리끼리만?" 나는 되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규칙상 백랑족이랑 무녀는 어울리면 안 되잖아."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떨궜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니까, 걸리지만 않으면 돼." 도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일이 월궁회에, 특히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냥 무시해버릴까. 도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일어나 버릴까.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게 편해요."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 작았다. "편한 거랑 재미없는 건 다르지." 준영이 카드 한 벌을 꺼내며 씩 웃었다. 손끝으로 카드를 촤르륵 넘기는 소리가 났다. "이거 할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드놀이 같은 걸 배울 기회가 없었다. 월궁회에서는 놀이 자체가 사치였다. 어릴 때부터 배운 건 오로지 예법과 의식뿐이었다. 손끝 하나 잘못 놀려도 회초리가 날아왔다. "그럼 가르쳐줄게." 준영이 카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건 이렇게 내는 거고, 숫자가 같으면 먹는 거고." 설명이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카드를 내려다봤다. 낯선 그림들이 손바닥 위에서 흔들렸다. "어? 방금 그거 아니지." 태민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준영아, 애 헷갈리게 하지 마." "내가 언제." 준영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도현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낮고 짧은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 웃는 얼굴을 처음 봤다. 생각보다, 훨씬 앳돼 보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뒤뜰에서 웃는 법을 조금 배웠다. 카드를 잘못 내서 태민에게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고, 준영은 그때마다 배를 잡고 웃었다. "야, 그거 세 번째로 틀리는 거야." "미, 미안해요···." "미안할 것까진 없는데." 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너 진짜 이런 거 처음 해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얼굴에 잠깐 묘한 침묵이 스쳤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오늘부터 매일 해." 도현이 짧게 말했다. 물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매 순간 주변을 살폈고, 종이 울리기 십 분 전에는 늘 먼저 자리를 떴다. 담벼락 너머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카드를 쥔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뭐야, 또 그러네." 준영이 놀리듯 말했다. "쟤 좀 봐, 다람쥐처럼 계속 두리번거려."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내가 대답 대신 작게 중얼거렸다. "들키면 저만 문제인 게 아니니까요." 그 말에 순간 세 사람 표정이 굳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온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벌써 가?" 도현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들키면 안 되니까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저릿했다. 그 순간, 온실 담벼락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스쳤다. 나는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 쿵, 쿵, 세 번을 연달아 내리쳤다. 다행히 그림자는 곧 사라졌다. 지나가던 교사였는지, 다른 학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장은 한참 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괜찮아?" 도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가방을 챙겨 드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현이 그걸 봤는지 안 봤는지 알 수 없었다. "내일도 올 거지." 준영이 등 뒤에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밤, 기숙사가 아닌 월궁회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골목 하나를 돌 때마다, 가로등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등 뒤가 서늘했다. 혹시 낮에 본 그림자가 나를 따라온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그리고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당에 서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최여옥이었다. 한복 자락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만으로도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오늘따라 늦었구나."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손끝으로, 다시 옷자락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마치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낱낱이 읽어내려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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