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할머니의 눈은 늘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 시선이 나를 덮쳤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늦은 이유가 뭐냐."
"수업이··· 조금 길어져서요···."
거짓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동안 손끝이 떨렸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하려고 나는 숨을 참았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최여옥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이 마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교복 치마 끝에서부터 시작된 눈길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무릎, 허리, 어깨를 지나 마침내 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들어가서 주문서나 외워라."
짧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네···."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등 뒤로 할머니의 시선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문을 닫고 나서야 겨우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주문서를 펼쳤다. 글자들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몇 번이나 손끝으로 매만진 흔적이었다.
종이 모서리는 이미 닳아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이 책상 앞에서 보냈는지, 나조차 헤아릴 수 없었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이 방에는 온기가 없었다.
『서인아, 이건 위험한 주문이야. 아직 외우지 마.』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아팠다.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처지던 모습도, 내 이름을 부르던 그 특유의 억양도,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최다은. 나의 어머니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사람. 그래도 나를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
혈견대의 습격이 있던 그날 밤, 어머니는 나를 감싸 안고 죽었다.
그날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피 냄새와 타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의 팔이 나를 감싸던 그 마지막 온기도, 점점 식어가던 감촉도.
그 후로 할머니는 변했다. 아니, 어쩌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딸을 잃은 슬픔이 그녀를 더 날카롭게 만들었을 뿐.
분노의 화살은 언제나 나를 향했다.
주문서를 외우다 실수하면 손등을 맞았다.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나는 견뎠다. 견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손등의 흉터는 이제 희미해졌지만, 맞을 때의 감각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회초리가 부딪히던 소리, 그 짧고 날카로운 통증.
『네 어미처럼 정신 놓고 살다가 뒈지고 싶으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다음 문장을 외우는 수밖에.
그런데 요즘,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
뒤뜰에서 웃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도현, 준영, 태민과 보내는 짧은 점심시간이, 나에게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할머니의 시선도, 월궁회의 규율도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학생처럼,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 나는 여느 때처럼 뒤뜰로 향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며칠 전부터 익숙해진 길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낯선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한지완이었다.
회색 머리카락 아래로, 냉랭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은 마치 처음 보는 벌레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서 노골적인 경멸이 느껴졌다.
"너였구나."
그가 낮게 말했다.
"도현이 요즘 계속 여기 오길래 뭔가 했더니."
그 말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지완아."
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막아섰다.
"그만해."
"뭘 그만해."
지완이 팔짱을 꼈다.
그 자세만으로도 그의 태도가 얼마나 완강한지 느껴졌다.
"쟤 월궁회 애야. 우리랑 어울릴 자격 없는 거 몰라?"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익숙한 말이었는데도 아팠다.
익숙하다고 해서 덜 아픈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몇 번이고 들어도 그 말은 매번 새로운 상처를 남겼다.
"자격을 누가 정해."
도현이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놀라서 도현을 쳐다봤다. 늘 부드럽고 여유롭던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딱딱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지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를 힐끗 보고는 몸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그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남은 자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침묵을 채웠다.
"미안."
도현이 나를 보며 사과했다.
"지완이가 원래 저런 애는 아닌데."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준영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카드를 꺼냈다.
"자, 오늘도 한 판 할까?"
그의 손짓이 평소보다 부산스러웠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태민이 웃으며 거들었다.
"서인이 요즘 실력 늘었어."
그렇게 다시 웃음이 돌아왔지만, 나는 지완의 눈빛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카드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웃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말이 맴돌았다.
『쟤 월궁회 애야. 우리랑 어울릴 자격 없는 거 몰라?』
자격. 그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 저녁, 사택으로 돌아온 나는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문이었다.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최여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애 얼굴이 좀 밝아진 것 같지 않으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월궁회의 다른 무녀였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밝아졌어."
최여옥의 목소리에 낮은 의심이 배어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의 것 같았다. 차분하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유가 뭔지 알아봐야겠다."
나는 문 앞에서 숨을 죽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옆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곧 닥쳐올 무언가를 예감했다.
발끝을 살짝 뒤로 물렸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그러나 그 순간, 방 안에서 최여옥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