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었다고 벌 받았어

4화

학원 뒤편, 낡은 창고 근처는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칠이 벗겨진 담벼락과 곰팡이 낀 배수구 냄새가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 길을 골라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무녀라는 이유로, 나는 늘 누군가의 구경거리였다. 수군거림, 흘겨보는 눈, 등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그런 것들을 피해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이 없는 길만 골라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인기척이 있었다. 발소리가 아니라, 낮게 깔린 웃음소리였다. "거기, 무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백랑족 상급생 몇 명이 창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교복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채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딱 봐도 시비를 걸 작정으로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숨을 죽이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그러나 그중 하나가 팔을 뻗어 내 앞을 막아섰다. "뭐가 그렇게 급해." 다른 하나가 낄낄거렸다. 키가 큰 남학생이었다. 팔뚝에 늑대 문신 같은 흉터가 있었다. "요즘 도현이랑 어울려 다닌다며. 감히."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문이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하긴, 백랑족 후계자가 무녀와 함께 다니는 걸 못 볼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저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목소리가 떨렸다. "지나가는 길? 이 길로?" 그가 코웃음을 쳤다. "이 길로 다닐 이유가 뭐 있어. 도현이 만나러 오는 거 아니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 명이 내 어깨를 밀쳤다. 나는 뒷걸음질치다 창고 벽에 부딪혔다. 등이 얼얼했다. 벽돌의 거친 표면이 교복 위로도 그대로 느껴졌다. "어울릴 자격도 없으면서."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맞을 걸 각오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뭐 하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도현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와 상급생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의 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넓고, 단단했다. "백도현?" 상급생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뭐야, 진짜로 같이 다니는 거였어?" 누군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도현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호박색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였다. "손대지 마."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무게가 상급생들을 압도했다. "우리는 그냥···." "꺼져." 도현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목소리 끝에 낮은 진동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마치 정말로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처럼. 상급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도현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도현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얼굴에는 방금 전의 서늘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걱정만이 남아 있었다. 대답을 하려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가 재빨리 팔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기듯 기울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교복 너머로도 뜨거울 정도의 체온이었다. 백랑족 특유의 높은 체온인 걸까. "놓치는 줄 알았잖아."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숨을 쉬지 못했다.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안겨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아무도 나를 이렇게 감싸안아 주지 않았다. 『서인아.』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문득 겹쳐졌다. 『엄마가 지켜줄게.』 그 말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를 두고 떠났고, 나는 혼자 남아 무녀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나는 도현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큰 손이 등을 쓸어내리는 감촉에, 참았던 무언가가 더 크게 무너졌다. "울어도 돼."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여기서는 아무도 안 봐." 나는 결국 그의 품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무언가가 터진 것 같았다. 어깨가 들썩였다. 숨이 끊어질 듯 가빴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등을 계속 쓸어내려 주었다. 그 손길이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아서, 나는 더 서럽게 울었다. 한참 후, 나는 겨우 몸을 떼며 눈물을 닦았다. 눈이 퉁퉁 부어 있을 게 뻔했다. "죄송해요···. 옷 다 젖었겠다···." 그의 셔츠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 거 신경 안 써." 도현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다시 한번 숨이 막혔다. 방금 전까지 상급생들을 짐승처럼 노려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진한 웃음이었다. "근데." 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저 자식들, 계속 이럴 것 같은데. 괜찮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익숙해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스스로도 씁쓸했다. 익숙하다는 말은, 그만큼 오래 겪어왔다는 뜻이니까. "익숙하다고 괜찮은 건 아니잖아."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도현은 부쩍 더 나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등하굣길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슬쩍 옆을 지켰다. 하루는 정문에서, 하루는 골목 어귀에서, 또 하루는 매점 앞에서. 마치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상급생들이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눈빛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복도에서 마주친 남학생 하나가, 도현의 시선 한 번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발걸음을 돌리는 걸 본 적도 있었다. 그 과잉보호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누군가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 그것이 얼마나 낯설고, 또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밥은 먹었어?" "오늘은 뭐 하는데." "그거 무거워 보이는데 이리 줘." 사소한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이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온기가 오래갈 수 없다는 걸. 도현은 백랑족의 후계자였고, 나는 그저 무녀였다. 애초에 같은 자리에 설 수 없는 사이였다. 『요즘 애 얼굴이 좀 밝아진 것 같지 않으냐.』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투에는 걱정보다는, 경계에 가까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이미 누군가 그 사실을 할머니 귀에 넣었다는 뜻이었다. 이 마을에서 소문이 얼마나 빠르게 퍼지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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