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언니, 좋아하면 안 돼요?

1화

이수아는 지하철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냉방이 센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손끝부터 식어갔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종이가방을 다시 확인했다. 와인 한 병, 준서가 좋아하는 브랜드였다. 포장지가 구겨지지 않았는지, 리본이 풀리지 않았는지 세 번째 확인이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터널, 그 위로 흐릿하게 겹치는 자신의 얼굴. 수아는 그 얼굴을 잠깐 들여다봤다. 웃고 있지도 않은데 왠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습관이었다. 언제나 괜찮은 척, 무너지지 않은 척. '괜찮아. 그냥 저녁이야. 그냥 저녁 한 번이야.' 하지만 심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준서의 새 집에 처음 초대받은 날이었다. 2년 연애 끝에, 그가 드디어 자신의 공간으로 그녀를 불렀다. 좋은 신호였다. 그런데도 명치 아래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역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살짝 저릿했다.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손에 든 종이가방이 자꾸 부딪혔다. 그녀는 그것을 가슴 쪽으로 더 바짝 끌어안았다. 밤공기는 선선했지만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준서가 서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팔짱을 끼고. — 늦었네. — 미안, 버스가. 그가 손을 뻗어 종이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옷차림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수아는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 그 원피스, 저번에 사준 거 안 입었네. 수아는 웃었다.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연습된 근육의 움직임이었다. — 오늘은 편한 거 입고 싶어서. 준서는 별말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그의 등을 보며 수아는 잠깐 숨을 골랐다. 방금 그 표정, 아주 짧게 스쳤던 실망의 기색. 못 본 척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집 안은 넓고 깔끔했다. 회색 소파, 각 잡힌 커튼, 벽에는 그가 좋아하는 흑백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다. 수아는 신발을 벗으며 낯선 공기 냄새를 맡았다. 새 가구 냄새와 섬유향이 뒤섞여 있었다. 그 사이로 낯선 향, 담배 냄새 같기도 하고 향수 같기도 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준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 여기 앉아. 뭐 마실래? — 물이면 돼. 준서가 부엌으로 걸어가는 사이, 수아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봤다. 낮은 테이블 위에 놓인 라이터, 재떨이 대신 쓰는 듯한 접시. 그녀의 시선이 그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때,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철컥.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키가 크고, 짙은 색 밴드 티셔츠에 검은 가죽 팬츠를 입은 사람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눈매는 나른했다. 손목에는 은색 체인 팔찌가 여러 개 겹쳐 걸려 있었다. 걸음걸이마저 어딘가 여유로웠다. 마치 이 공간이 완전히 자기 것인 사람처럼. 수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예쁘다.' 생각이 먼저였고, 당황이 그다음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이런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왔어? 니가 말한 그 여자친구구나. 낮고 걸걸한 목소리였지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준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물컵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 누나. 왔으면 미리 말을 해야지. — 내 집이기도 한데 뭘. 주희라는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손톱에는 검은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얇은 반지가 몇 개 끼워져 있었다. — 강주희. 준서 이복누나. 수아는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이 놀랍도록 단단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준서의 손과는 다른 온도였다. — 이수아예요. — 예쁜 이름이네. 짧은 한 마디였는데도 수아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녀는 얼른 그 감각을 밀어냈다. '좋은 여자친구는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지.' 그녀는 웃으며 준서 쪽을 슬쩍 돌아봤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물컵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탁. — 누나 여기 며칠 있다가 간다고 했잖아. — 며칠이 좀 늘어날 수도 있고. 주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더니 캔맥주 하나를 꺼내 땄다. 딸깍. 거품 새는 소리가 짧게 났다. 주희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 동작 하나에도 시선이 갔다. 수아는 애써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 저녁 뭐 먹어? 나도 껴도 돼? 준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수아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남매 사이라면 흔한 투정 같은 건데, 준서의 반응은 그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 그래, 같이 먹자. 뜻밖에도 준서가 그렇게 답했다.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마치 이 상황을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사람처럼. 수아는 소파에 앉으며 주희를 흘긋 바라봤다. 캔을 든 손, 나른하게 걸친 다리,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공간을 압도하는 존재감이 있었다. 마치 이 집의 모든 공기가 그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 사람 앞에서는 뭘 조심해야 하는 거지.' 준서가 배달 앱을 켜며 메뉴를 고르는 동안, 주희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캔을 흔들며 수아를 향해 눈을 맞췄다. — 수아 씨는 뭐 좋아해? 매운 거? —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 나는 별로 안 믿는데. 주희가 픽 웃으며 캔을 기울였다. 그 웃음에는 장난기와 함께 뭔가 시험하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수아는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따라 웃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주희가 갑자기 수아 쪽을 향해 캔을 살짝 들어 보였다. — 우리, 나중에 얘기 좀 하자. 재밌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준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 누나, 밥이나 시켜. — 알겠어, 알겠어. 하지만 주희는 웃기만 했다. 그 웃음 속에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준서가 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자, 거실에는 잠시 수아와 주희만 남았다. 정적이 낯설게 내려앉았다. 주희가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은색 체인 팔찌가 부딪히며 짧은 소리를 냈다. — 긴장할 필요 없어. 나 나쁜 사람 아니야. —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요. — 근데 표정은 안 그런데. 수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주희의 눈이 자신의 얼굴을, 아니 정확히는 눈동자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마치 겉으로 짓는 미소 뒤에 숨겨진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수아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만 심장이 다시 빨리 뛰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았다. 그 박동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그녀 자신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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