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저녁은 배달 피자로 대체됐다. 준서가 정리를 이유로 요리를 미뤘고, 주희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 오늘은 그냥 시켜 먹자. 어차피 다 어수선한데 뭘 또 요리를 해.
주희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며 말했다. 준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러자.
피자가 도착하자 세 사람은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페퍼로니와 콘치즈. 준서가 늘 시키던 조합이었다. 수아는 조각을 집으며 슬쩍 주희의 접시를 살폈다. 주희는 도우 끝을 남기고 토핑만 골라 먹고 있었다.
— 저는 도우 남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 배불러서 그래. 살찌는 부분은 이거잖아.
주희가 웃으며 도우 조각을 준서 쪽으로 밀었다. 준서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집어 먹었다. 수아는 그 짧은 손짓 사이에서 어떤 익숙함을 느꼈다. 오래된 습관 같은 것.
식사가 끝나자 주희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다시 집어 들었다.
— 게임 좀 할까. 준서 저거 콘솔 산 지 반년 됐는데 한 번도 안 켠 거 알아?
— 바빠서 그런 거야.
준서가 낮게 대꾸했다.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섞여 있었다. 주희는 이미 콘솔을 켜고 있었다. 화면에 대전 격투게임 로고가 떠올랐다. 파랗고 붉은 빛이 어두운 거실 벽에 번졌다.
— 수아씨, 해봤어?
— 아, 저는 게임을 잘 못해서요.
— 못해도 돼. 그냥 눌러.
주희가 컨트롤러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손끝이 살짝 스쳤다. 손톱 끝에 남은 온기가 묘하게 오래 남았다. 수아는 그 짧은 접촉에 몸이 굳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손 스친 거야.'
하지만 심장은 다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쿵, 쿵. 박자가 어긋났다.
게임이 시작됐다. 수아는 버튼을 아무렇게나 눌렀다. 캐릭터가 화면 안에서 어색하게 움직였다. 발이 꼬이고,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반면 주희의 손가락은 정확하고 빠르게 컨트롤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마디마디가 리듬을 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콰앙. 화면 속 캐릭터가 나가떨어졌다.
— K.O.
— 아 뭐야, 너무 잘하잖아요.
— 이 정도는 기본이지.
주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 이런 거 잘하면 인생이 좀 편해져.
— 그건 또 무슨 논리예요.
— 몰라. 그냥 그런 게 있어.
주희가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그 애매함이 오히려 더 궁금증을 자극했다.
준서는 소파 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입가가 굳어 있었고, 시선은 화면이 아니라 두 사람의 손을 오갔다. 수아는 그 시선을 느끼며 다시 웃음을 만들어냈다.
'즐거운 척해야 해. 준서가 불편해하지 않게.'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자 수아는 조금 더 집중했다. 화면을 노려보며 타이밍을 재보려 애썼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 번 크로스카운터를 성공시켰다. 캐릭터가 상대를 튕겨내는 순간, 짧은 이펙트음이 거실을 울렸다.
— 오, 방금 그거 좋았어.
주희가 진심으로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손끝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다시 리플레이를 돌려보기까지 했다. 그 순간 수아는 알 수 없는 만족감이 가슴을 채우는 걸 느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감각이 이렇게 단순하게 사람을 붙드는 줄 몰랐다.
— 다시 해볼래?
— 네, 해볼게요.
세 번째 라운드가 이어졌다. 주희는 여전히 압도적이었지만, 어딘가 봐주는 듯처럼 손을 조금씩 늦추는 것 같기도 했다. 수아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때 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테이블 위에서 짧게 떨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멈춘 게임 캐릭터가 그대로 서 있었다.
주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 쟤 원래 저래?
— 네?
— 계속 눈치 보는 거. 너 표정 관리하는 거 다 보여.
수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들킨 걸까.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시선을 컨트롤러 쪽으로 떨어뜨렸다.
—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래?
주희는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비웃음이 아니라 어떤 이해가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래전 자신도 같은 표정을 지어본 적 있다는 듯이.
— 나도 그런 척 오래 했었어.
— 무슨 뜻이에요, 그게.
—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아니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준서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왔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 회사에서 급한 일이래.
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리모컨을 가져갔다. 화면이 꺼졌다. 거실이 순간 어두워지며 침묵이 내려앉았다.
— 이제 그만하자. 수아도 피곤할 텐데.
— 아직 좀 더 할 수 있는데.
주희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
— 너, 예전엔 안 이랬는데. 사람 있으면 더 잘하려고 했잖아.
순간 준서의 얼굴에서 색이 빠졌다. 손끝이 리모컨을 쥔 채로 미세하게 굳었다.
— 무슨 소리야.
— 됐어. 넘어가.
— 누나.
— 신경 쓰지 마. 그냥 옛날 얘기야.
그 짧은 교환 속에 무언가 오래된 갈등이 스쳐 지나간 걸 수아는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준서는 더 이상 그 화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수아는 그저 컨트롤러를 내려놓으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뭐라도 말을 얹어야 할 것 같았지만, 어떤 말도 이 자리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준서가 수아를 배웅하며 낮게 말했다. 현관 앞, 계단을 내려가려는 그녀의 팔을 슬쩍 붙잡으며.
— 누나 좀 조심해. 사람 홀리는 거 잘해.
— 그게 무슨 말이야?
— 그냥, 그런 사람이야. 가까이 가면... 다치는 사람들이 많았어.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이 경고라기보다 다른 무언가로 들렸다. 마치 준서 자신도 그 '가까이 간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처럼.
— 알겠어. 조심할게.
— 그래. 잘 가.
준서는 문을 닫기 전,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삼켰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주희가 쥐여준 컨트롤러의 감촉을 손끝으로 되짚어 보았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는데도, 감각은 자꾸 되살아났다.
창밖으로 불빛들이 흐르듯 지나갔다. 가로등, 상가 간판, 정류장의 노란 조명. 그 사이로 주희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척 오래 했었어.'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위로처럼 느껴졌다.
'왜 아직도 심장이 이렇게 뛰지.'
대답 없는 질문이 창밖 불빛 속으로 흩어졌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으로 접어들 때까지, 수아는 계속 그 질문을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 떠오른 얼굴은, 준서가 아니라 주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