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삑- 삑- 삐빅-
의료기기가 규칙적으로 울어대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민지가 나가고 홀로 남은 시간, 본좌는 천장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켜보려 하였다.
'가벼운 시도로도 충분하리라.'
그러나 팔꿈치로 상체를 받치려는 순간, 온몸이 마치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너져 내렸다.
"...허어."
본좌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예전이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능히 산문을 부수었을 몸이거늘, 지금은 이불조차 밀어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다시 한번 시도해보았다. 이번엔 발가락 끝에 힘을 모아보았으나, 그마저도 미약한 떨림에 그치고 말았다. 마치 백 년 묵은 노목이 바람 한 줄기에도 휘청거리는 것과 같았으니, 참으로 서글픈 노릇이었다.
'이 몸이 어찌 이토록...'
[알림: 상태창을 확인해 주세요.]
[알림: 포커스 참 잔여 효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알림: 현재 마력 수치 0/1000입니다.]
눈앞에 대뜬 반투명한 판형이 둥둥 떠올랐다. 본좌는 이것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으니, 어렴풋이 낯이 익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무공비급*武功祕笈: 무예를 적어놓은 비밀스러운 책의 표지를 다시 본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더냐."
혼자 중얼거려 보아도 답해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본좌는 판형을 손가락으로 눌러보았으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 마치 허공에 그려진 그림을 만지는 듯한 감촉뿐이었다. 손끝을 좌우로 휘저어보았으나, 그 판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영판*靈板: 신령스러운 판, 즉 상태창의 은어이로다."
스스로 명명해놓고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웃을 여력조차 없었으니, 온몸에서 힘이 새어나가는 듯한 이 감각이 못내 불안하였다. 숫자 '0'이라는 것이 이토록 서늘하게 다가올 줄이야. 마치 곳간이 텅 비어버린 지주*地主: 땅을 가진 자의 심경과 같았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붉은 머리의 여인이 들어섰다.
서연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서 본좌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반가움과 경계심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붉은 머리칼이 창문에서 새어드는 빛을 받아 은은히 타올랐고, 그 아래 눈동자만이 유독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깨어났네."
"오오, 그대는..."
본좌는 반가움에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다시 힘없이 주저앉았다. 서연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서두름이 없었으나, 의자에 앉는 손길에는 미묘한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움직이려고 하지 마. 지금 너 상태 안 좋아."
"어찌 알았느냐."
"보이니까."
서연의 목소리는 짧고 건조했다. 마치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이니라. 이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무력해졌는가."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표정에는 결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검을 뽑기 전 숨을 고르는 무인의 모습과 같았다.
"그날 이후로 네 힘이 봉인됐어."
"...뭐라?"
"컨벤션에서, 포커스 참에 노출됐을 때. 그게 폭주하면서 네 안의 마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았고, 시스템이 강제로 그걸 봉인했어. 안 그랬으면 너 그날 죽었을 수도 있어."
본좌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마력이라니, 봉인이라니, 이는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방금 본 영판*상태창의 존재가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허나...'
허나 그 말투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본좌가 처음부터 이 세계의 규칙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이것이 당연한 상식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으니, 마치 전생의 기억이 몸 어딘가에 아교처럼 눌어붙어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네 몸은 거의 일반인 수준이야. 마력도 없고, 힘도 없고."
"허어..."
본좌는 신음을 삼켰다. 천하를 호령하던 힘이 하루아침에 먼지가 되었다는 것인가. 이는 마치 무림지존이 산문 앞에서 목검조차 들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전락한 것과 같으니, 참으로 굴욕적인 일이었다.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이 분노인지 서러움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언제 풀리느냐."
"몰라."
"모른다니..."
"진짜 몰라. 시스템도 정확한 기간을 말 안 해줘. 그냥... 봉인 해제 조건이 뭔지도 몰라."
서연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녀 역시 이 상황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본좌는 그 짜증 속에 숨겨진 걱정을 어렴풋이 느꼈으나, 겉으로는 그저 냉담한 표정만이 유지되고 있었다.
"허면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만 있어야 하는가."
"모른다니까."
"그대의 그 짧은 대답이 본좌를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도다."
"그럼 뭐, 내가 없는 답을 지어내서 말해줘? 그게 더 나아?"
서연의 반문에 본좌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없는 것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그 냉정한 사실이 차라리 나았으리라.
"...서연아."
"뭐."
"그대는 어찌 이렇듯 냉정하게 이 소식을 전하는가."
서연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병실의 정적을 갈랐다.
"냉정하지 않으면 못 견뎌서 그래."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의 여운이 사그라들 때까지, 본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본좌는 홀로 남아 다시 영판을 바라보았다.
[마력 수치: 0/1000]
[봉인 상태: 지속 중]
두 줄의 문구가 냉정하게 떠 있었다. 그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 없었으니, 마치 얼어붙은 계곡물처럼 멈춰 있었다.
'천하제일이 이제는 최약체로 전락하였구나.'
스스로 되뇌면서도, 본좌는 그 말에 담긴 실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였으니, 지금 이 순간 본좌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 손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가 이토록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창밖에서 다시 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번엔 확실히, 사람의 형체였다.
본좌는 숨을 멈추었다. 그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창밖에 서 있었으니,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였다. 병실 안의 불빛과 바깥의 어둠이 대비되어, 그 형체의 윤곽만이 유독 또렷하게 드러났다.
'저것이 무엇이더냐.'
본좌는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다시 그 무력함이 발목을 붙잡았다. 손가락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 순간, 창밖의 그림자는 서서히 병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