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후, 본좌는 마침내 퇴원의 허락을 받았다. 몸은 여전히 예전만 못했으나, 걷고 말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병상에 누워 지낸 지난 한 달, 그 기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격세지감(隔世之感):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
퇴원 수속을 밟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본좌에게는 마치 무림맹*협회, 여기선 병원 행정실의 관문을 뚫는 듯한 고난이었다. 종이 뭉치에 서명을 하라 하고, 공납*신용카드을 대라 하고, 통행패*환자 등록증를 보이라 하는데, 그 모든 절차가 어찌나 번잡한지 본좌는 속으로 몇 번이고 한숨을 삼켰다.
"오늘 학교 가는 거 진짜 괜찮겠어?"
민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우려가 서려 있었으니, 본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괜찮으니라. 언제까지 병상에만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무리하지 마. 힘들면 바로 말해."
민지의 말이 짧아졌다. 걱정과 명령이 뒤섞인 어조였다. 본좌는 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애정을 모르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가마*자동차에 몸을 싣고 대학교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본좌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병상에 누워 있던 한 달 동안,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갔을 터인데, 오직 본좌만이 그 시간 속에서 홀로 정지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대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본좌는 이곳을 다시 본다는 사실에 묘한 감회가 들었다. 무림맹*협회 건물, 여기선 대학교을 다시 밟는 기분이었다. 정문의 돌기둥을 지나며, 본좌는 마치 폐관 수련을 마치고 하산하는 무인의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상전벽해*로다. 이곳을 떠난 것이 한 달인데, 어찌 이리도 낯설게 느껴지는고.'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듯 세상이 크게 변함.
그러나 정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본좌를 향해 힐끔거렸고,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저기 걔 아냐?"
"한 달 동안 실려갔다는 애?"
"근데 진짜 유진 선배랑 뭔 일 있었대며."
"쉿, 들려."
작은 속삭임들이 귓가에 스쳤다. 본좌는 그 말들을 못 들은 척했으나, 속으로는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본좌는 애써 정면만을 응시했다.
'무엄하도다. 어찌 본좌를 두고 함부로 뒷말을 하는가. 이는 필시 소인배*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소인배(小人輩): 그릇이 작고 도량이 좁은 무리.
하윤이 그 소리를 듣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본좌의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며, 마치 방패라도 되어주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오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소문일 뿐이에요."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이더냐."
하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끝이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무언가 말하기 곤란한 내용임을 짐작케 했다.
"유진 선배가... 오빠한테 뭔가 저주를 걸었다는 얘기가 돌아요. 그래서 오빠가 한 달 동안 못 일어난 거라고..."
"허어..."
본좌는 침묵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는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저주라니, 그것은 흑도*의 방식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구라는 곳에도 흑도가 존재한단 말인가.
*흑도(黑道): 정도(正道)를 벗어난 사악한 술법이나 무리.
강의실로 향하는 길, 서연이 앞장서서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등이 순간 딱딱하게 굳는 것이 뒤에서도 느껴졌다.
"...저게 뭐지."
그녀가 가리킨 곳은 강의실 문이었다. 문에는 붉은 페인트로 무언가가 휘갈겨져 있었다.
[돌아왔구나, 지훈아.]
그 아래에는 작은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으니, 그것은 이빨을 드러낸 짐승의 형상이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보면, 흡혈귀의 송곳니를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이것은..."
본좌의 몸이 굳었다. 이는 명백한 경고였다. 누군가가 이곳에 다녀갔다는, 그리고 본좌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서고지*가 아닌가. 필시 본좌에게 보내는 서신이렷다.'
*전서고지(戰書告知): 전투를 알리는 서신이나 통보.
민지가 서둘러 다가와 문을 살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유진이다. 이거 완전 유진 스타일이야."
"확실하냐."
"확실해. 저 그림, 유진이 옛날에 자주 그리던 거야. 노트 귀퉁이마다 저런 걸 그려놨었어."
민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누가 지웠어야 했는데. 학교 측에 신고해야 될 것 같아."
서연은 팔짱을 낀 채 그 낙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무언가 참고 있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이거... 최근에 그려진 거야. 잉크가 아직 안 말랐어."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낙서로 향했다. 붉은 페인트가 여전히 축축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빛깔이 마치 갓 흘린 선혈*처럼 보여, 본좌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혈(鮮血): 갓 흘러나온 붉은 피.
'그렇다면 유진이라는 여인, 바로 이 근방에 있다는 뜻이 아닌가.'
본좌는 주위를 살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으나,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는 마치 은신술*을 극에 달한 고수가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은신술(隱身術): 몸을 숨기는 술법.
하윤이 갑자기 가슴을 움키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오빠... 뭔가 느껴져요. 되게... 슬프고, 화나고, 미친 것 같은 감정이..."
"하윤아, 무슨 소리이냐."
"공감이... 뭔가 강하게 반응해요. 이 근처에, 누군가 있어요."
하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복도 끝, 계단으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를 가리켰다.
"저기서요."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계단 아래,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붉은 것이 반짝였다.
두 개의 붉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잠시 이쪽을 응시하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민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었는지, 손톱이 살에 파고드는 듯했다.
"...쫓아가야 하나."
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본좌 역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아니,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떨쳐내며, 본좌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본좌가 두려워한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는 그저 신중을 기하는 것일 뿐이니라.'
그러나 그 다짐과는 달리,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본좌는 그 떨림을 감추기 위해 옷소매 속으로 손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본좌는 그 붉은 눈동자가 사라진 어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이며 지지직 소리를 냈고, 그 짧은 명멸 사이로 어둠은 더욱 깊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확신했다.
유진이라는 여인이, 이미 이 근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 확신은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본좌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으니, 이 대학교라는 곳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평온한 배움의 터가 아님을, 본좌는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