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심사장은 어제 그 평원 근처의 넓은 광장이었다.
돌바닥이 차가웠다.
새벽 공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인지,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남은 열댓 명이 한 줄로 서 있었다.
다들 어제 그 텐트에서 밤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옷은 후줄근했고, 얼굴은 잠을 제대로 못 잔 기색이 역력했다.
앞쪽 단상에 갑옷 입은 사람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고, 그 가운데 흰 검을 든 남자가 명단을 들고 있었다.
갑옷은 반짝거리는 판금이 아니라 가죽에 금속판을 덧댄 형태였는데, 실전용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장식이 아니라 진짜 쓰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목소리가 광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 명씩 불려 나가 뭔가를 시연했다.
손에서 불꽃이 튀거나 검을 소환하는 식이었다.
어떤 남자는 손바닥을 펼치자 작은 물의 구슬이 떠올랐고,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표시를 했다.
또 어떤 여자는 발밑에서 풀이 자라나는 걸 보여주더니 무난하게 통과했다.
다들 뭔가 있었다.
나만 없는 건가.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확인이 끝나면 오른쪽 문으로 통과했다.
그 문 너머가 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이쪽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이준서."
내 이름이 불렸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리가 뭔가에 붙잡힌 것처럼 무거웠다.
발을 뗄 때마다 돌바닥의 냉기가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손을 들어라. 무엇이든 보여라."
나는 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어제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한 번 더 손을 흔들어봤다.
혹시 몰라서, 정말 혹시 몰라서.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축복이 없군."
남자가 서류에 뭔가를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몇몇이 나를 힐끔거렸다.
그 시선들이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아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윤서아."
다음은 서아였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서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옆에서 그 반응을 봤다.
서아도 손을 들었다.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서아는 두 번, 세 번 손을 흔들었다.
손끝에서 뭔가 튀어나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까지 파리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는 게 더 무서웠다.
내가 겁먹은 것보다, 서아가 저렇게 무너지는 걸 보는 게 훨씬 더 아팠다.
심사가 끝나자 남자가 명단을 접었다.
접히는 소리마저 사무적이었다.
"축복 없는 자 확인. 열두 명."
그러더니 뒤에 서 있던 갑옷 입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의심자로 분류, 격리소로 이송."
의심자.
그 두 글자가 귀에 박혔다.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자꾸 되풀이됐다.
의심자, 의심자, 의심자.
내가 뭘 했다고.
"저희가 뭘 의심받는 건데요?"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눈빛이 서늘했다.
내 존재 자체를 서류의 오류처럼 취급하는 눈빛이었다.
"신께서 이 땅에 불러온 자들에게는 반드시 축복을 내리신다. 그것이 우리 세계의 규칙이다."
"저희만 없다는 게, 저희가 다른 세계에서 온 스파이라는 뜻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스파이라니.
말도 안 됐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스마트폰으로 웹툰 보다가 담임한테 걸릴까 봐 벌벌 떨던 고3이었다.
스파이라고 하면 첩보 영화 같은 걸 떠올렸을 텐데, 지금 내 처지는 그런 것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었다.
【아군의 위장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디선가 또 그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아예 대놓고 나를 도둑놈 취급하는 소리였다.
아니, 위장체는 무슨.
내가 위장체였으면 이 상황에서 이렇게 떨고 있겠냐고.
"저는 그냥 서울 대성고등학교 3학년이에요! 아빠, 엄마, 담임선생님 다 있어요!"
내가 소리쳤다.
목이 아플 정도로 크게 외쳤다.
담임선생님한테 혼나면서도 매일 자율학습 도장 받으러 뛰어다녔던 나날들이, 이렇게 억울하게 증거로 쓰이지도 못한다는 게 서글펐다.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병사들 몇몇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지만, 아무도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침묵 속에서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곧 망치 든 남자가 걸어왔다.
어제 봤던 그 얼굴이었다.
거대한 전투용 망치를 어깨에 걸치고, 걸을 때마다 갑옷이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목현. 이쪽 인솔한다."
다른 갑옷 입은 남자들이 대답했다.
"하도윤, 후방 경계."
흰 검을 든 남자, 하도윤이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검이 검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스릉, 하고 짧게 울렸다.
그 소리마저 이 상황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처리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 열두 명은 쇠사슬 같은 건 없었지만 사방을 갑옷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걸었다.
걸음마다 창끝이 등 뒤에서 어른거렸다.
도망칠 생각도 못 하게 완벽하게 짜인 진형이었다.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석조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 외벽에는 이끼가 잔뜩 껴 있었는데, 오래된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이곳은 뭔가요."
내가 물었지만 강목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뒤통수만 보면서 계속 걸었다.
건물 안은 좁은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복도는 어두웠고, 벽에 걸린 몇 개의 등불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방마다 문에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감옥이었다.
이걸 격리소라고 불렀나.
말장난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라."
나와 서아는 각각 다른 방에 밀어 넣어졌다.
"서아야!"
"준서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서아의 목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왔다.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나를 안심시키려는 목소리였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문이 쾅 닫혔다.
혼자 남은 방은 좁고 어두웠다.
방 안에는 짚더미 하나와 벽에 붙은 작은 창살 하나가 전부였다.
돌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니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세상이 뒤집혔는데, 스파이로 몰려서 감옥에 갇혔는데, 머릿속에서는 계속 편의점 삼각김밥이 떠올랐다.
참치마요였나, 불닭이었나.
이럴 때 이런 생각이나 하는 게 정상인가 싶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조금씩 바뀌는 걸 보고서야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몇 번이나 벽을 두드려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서아가 있는 방이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걸음이 아니라 가벼운 걸음이었다.
또각또각, 규칙적으로 울리는 발소리였다.
문 창살 사이로 붉은 옷자락이 보였다.
옷자락 끝에 금색 실로 무언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준서 소환자, 맞으시죠."
낮고 정중한 남자 목소리였다.
창살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붉은 종교복을 입고 있었다.
망토가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얼굴은 후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예의 바른 말투를 듣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대주교님이 곧 만나러 오실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또각또각, 왔던 것처럼 규칙적으로.
대주교라는 단어가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 세계에서 종교의 최고 권력자쯤 되는 사람이겠지.
그런 사람이 나 같은 축복도 없는 놈을 직접 보러 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좋은 쪽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방문 저편, 오늘 안에 뭔가가 결정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짚더미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나는 그저 그 발소리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