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낯선 몸, 다정한 아버지

2화

낯설다는 말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밭두렁에 앉아 낫을 손에 쥔 강두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벌써 들켰나. 이건 시작한 지 오 분도 안 됐는데 게임 오버라는 건가.' 속으로 자조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봅니다, 아버지." 존댓말이 튀어나온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뱉어진 뒤였다. 아침 햇살이 밭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흙냄새와 풀 비린내가 코끝을 스치는 와중에도 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촌구석 판타지 세계에 떨어져서 첫날부터 정체를 들키는 건 너무 클리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웃을 여유는 없었다. 강두석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물었다. "너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말했냐. 밭에서 넘어져서 머리라도 다친 게냐?" 그 지적에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더 흐르는 걸 느꼈지만,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며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아니, 그냥… 요즘 말투가 좀 이상해서요. 아니, 이상해서 그래." 말 끝을 억지로 반말로 고쳐 붙이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웠는데,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게 무슨 사춘기 반항아도 아니고 이게 뭔 꼴인가 싶었다. 강두석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내 얼굴을 살폈다. 아버지라는 사람 눈이 저렇게 매서웠던가, 아니 매서운 게 아니라 그냥 촌부 특유의 감이 좋은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그는 오래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몸도 그런데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내가 잠깐 밭에 초록 마법이나 걸어놓고 오마." 그가 허리를 펴며 손끝에 옅은 녹색 빛을 맺히게 하자, 밭 한쪽 모서리의 시든 새싹들이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으며 줄기를 곧게 세우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녹색 빛은 마치 작은 반딧불이 무리처럼 손끝에서 흘러나와 흙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뒤를 따라 잎사귀들이 파르르 떨리며 색을 되찾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는데,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광경을 실제로 목격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CG도 없이 이런 걸 눈앞에서 보다니, 죽어서 이세계에 떨어진 보상이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이게… 초록 마법입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고, 강두석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적하촌 농부라면 다들 익히는 기초 술법이지. 너도 어릴 때부터 배웠잖느냐." 그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이 몸의 원래 주인인 태민은 이 기술을 익혔을지 몰라도, 지금 이 안에 들어앉은 나는 손끝에서 불씨 하나조차 만들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이라니. 헬스장에서 벤치프레스나 좀 쳐본 게 전부인 인생이었는데, 갑자기 손끝에서 녹색 빛을 뽑아내라고 하면 그게 되겠는가. "요즘… 손이 좀 둔해져서요." 나는 최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짜냈고, 강두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미묘한 표정을 지웠다. "몸이 안 좋으면 마력도 흐트러지는 법이지. 오늘은 쉬어라." 그의 배려에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낫을 다시 허리춤에 꽂는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손등에 굵게 튀어나온 힘줄과 깊게 파인 주름을 보니, 이 몸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밭을 갈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태민이라는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삶을 통째로 물려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요즘 마을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고요?" 뜬금없는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 세계의 정보를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판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게임이라면 튜토리얼이라도 있었을 텐데, 여긴 그런 배려조차 없었다. 강두석은 잠시 낫을 손에 든 채 먼 산을 바라보다가 낮게 대답했다. "요즘 서쪽 관도에 인신매물상들이 부쩍 늘었다는 얘기가 돌더구나. 흉작이 든 마을에서는 자식을 몸 시장에 팔아넘기는 일도 있다지." 몸 시장이라는 말이 귀에 걸리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파편적인 지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 세계는 몸을 사고파는 게 합법인 세계인가.' 나는 속으로 되뇌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런 게… 합법적인 거래입니까?" 강두석은 씁쓸한 표정으로 낫을 다시 밭에 꽂으며 답했다. "대현국 법으로는 계약 노예는 인정되지. 몸을 넘기는 대신 빚을 갚거나, 마력이 뛰어난 자식을 귀족가에 팔아넘기는 일도 흔하고." "그러면… 한번 팔려가면 다시 돌아올 방법은 없는 겁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강두석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계약 기간이 정해져 있다면 모를까, 영구 계약이면 죽을 때까지 그 집안의 소유물이 되는 게지. 마력이 강한 아이일수록 값이 높게 매겨지니, 어떤 부모들은 자식 팔아넘길 궁리를 하기도 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설명에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건 단순한 노예 제도가 아니라 육체 자체를 상품처럼 유통하는 구조라는 뜻이었다. '나 지금 그런 세계에 낙하산으로 떨어진 건가.' 자조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이런 세계에, 하필이면 가난한 농가의 몸에 들어오다니, 신이 있다면 취향이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괜찮은 겁니까?" 내가 묻자 강두석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집안은 그럴 일 없다. 밭이 좀 작아도 빚은 없으니까. 걱정 말고 오늘은 좀 쉬어라." 그 말에 안심하려는 순간, 눈앞에 옅은 반투명 창이 다시 떠올랐다. [정보: 재능 '기생충'은 활성화 조건이 충족될 시, 생물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흡수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대상이 사망할 경우 흡수한 능력은 즉시 소멸합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거 완전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능력 아닌가. 남의 몸에 빨대 꽂고 능력만 쪽쪽 빨아먹는다는 거잖아.'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그 능력의 이름이 왜 하필 '기생충'인지 이제야 실감했다. 네이밍 센스가 대체 누구 작품인지, 시스템을 만든 놈이 있다면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두석이 문득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냐, 갑자기 얼굴이 하얘졌다." 나는 급히 손을 저으며 둘러댔다. "아, 그냥… 몸 시장 얘기 들으니 좀 무서워서요." 그가 픽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길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우리는 그럴 일 없다니까."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놓으려 했다. 밭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든 잎사귀 냄새를 실어 왔고,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태민이 매일 봐왔을 풍경이겠지, 하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아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눈앞의 창이 또 하나의 문장을 띄웠다. [경고: 근처에 미등록 마력 반응 다수 감지. 접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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