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교수님 목소리를 백색소음으로 흘려듣는 게 벌써 삼 년째였다.
전공, 학점, 알바, 반복.
이게 청춘이라면 나는 청춘을 반품하고 싶었다.
환불이요, 환불.
영수증 없어도 되죠?
교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는 하나도 안 들리고, 창밖에 비둘기 두 마리가 싸우는 게 더 흥미진진했다.
저것도 나름 생존경쟁일 텐데, 나는 저 비둘기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나?
아니, 솔직히 저 비둘기가 나보다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빵 조각 하나를 향한 저 순수한 열정.
나한테는 저런 열정을 불태울 대상조차 없었다.
전공 서적은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갔고, 학점은 3점대 초반에서 미세하게 진동만 할 뿐 요동치지 않았다.
알바는 편의점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다시 편의점으로 돌고 돌았다.
인생이 돌림판이라면 나는 그 돌림판 한가운데 못으로 박혀서 항상 같은 칸에 멈추는 그런 존재였다.
"오늘의 운세: 어제와 같음."
누가 이런 걸 타로카드로 팔면 대박 날 텐데.
그날도 똑같았다.
편의점 알바 마치고 자취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이 후줄근한 피로감은 매번 느껴도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지긋지긋했다.
천장 벽지 무늬를 세다가 문득 생각했다.
인생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딱 그 정도의, 흔하고 게으른 소원이었다.
로또 당첨 같은 구체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뭔가, 재미있는 일이 좀 일어났으면.
별 보고 빈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잣말이었다.
굳이 따지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는 그런 종류의 헛소리였다.
"아 퇴사하고 싶다" 급의, 진심 반 장난 반의 넋두리.
어차피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마음 편하게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소원을 들어줬으면 나는 이미 백만장자에 세계여행 중이었어야 했다.
[소원성취 시스템 005, 대상자 인식 완료]
뭐지?
분명 아무 소리도 없었는데 눈앞에 글자가 떴다.
그것도 허공에, 파란 네온사인처럼.
장난치나?
손으로 휘저어봤는데 만져지지도 않았다.
혹시 내가 아르바이트하다가 과로로 뻗어서 헛것을 보는 건 아닐까 싶어서 뺨을 세게 때려봤다.
철썩!
아팠다.
현실이었다.
아니, 현실인지 확인하려고 뺨을 때린 건데 아프다고 현실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
꿈에서도 아플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그 순간에는 그런 논리적 반박을 할 여유가 없었다.
[소원 접수: "지루한 삶을 바꾸고 싶다"]
[매칭 세계 탐색 중...]
야, 잠깐, 나 아직 동의 안 했는데.
이거 완전 약관 동의 안 눌렀는데 앱이 알아서 결제하는 그런 상황 아니냐.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하고 싶은데 신고 대상이 초자연적 존재라는 게 문제였다.
말릴 새도 없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했다.
번쩍!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낯선 방 안에 있었다.
*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느낀 건 냄새였다.
소독약, 사료, 그리고 뭔가 축축한 개 냄새.
여기가 어디야.
내 방 벽지 무늬는 분명 회색 물결이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건 하얀 형광등이었다.
코를 킁킁거려봤다.
이 냄새 조합, 어디서 맡아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났다.
동물병원이나 보호소 특유의 그 냄새, 소독약과 생명체가 섞인 그 애매한 냄새였다.
근데 내가 왜 동물병원 냄새를 맡고 있는 거지.
아까 자취방에서 분명히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어나려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이 내 손이 아니었다.
손등에 있던 흉터, 없었다.
손가락 길이도 달랐다.
이거 완전 남의 옷 입고 나온 느낌인데, 그냥 옷이 아니라 몸 자체가 남의 것이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폈다 해봤다.
움직이긴 하는데 뭔가 미묘하게 어색했다.
마치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처음 걷는 느낌, 딱 그런 느낌이었다.
거울 좀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났는데 다리도 낯설었다.
걸음걸이가 뭔가 어색했다.
마치 남의 신발을 신은 느낌.
한 발 내딛는데 무게중심이 이상하게 잡혀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니 이게 뭐야, 발목이 왜 이렇게 유연해.
평소 내 몸이랑은 완전히 다른 밸런스였다.
[숙주 정보: 이하준, 28세, 수의사]
[상태: 감정불안정증(경도)]
숙주?
뭔 숙주나물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숙주라는 단어 들으니까 갑자기 나물무침 생각나는데,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인가.
근데 자세히 보니 벽에 걸린 자격증에 '이하준'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수의사 면허증이었다.
설마.
설마 내가 이 사람 몸에 들어온 거야?
바디스왑도 아니고 완전 숙주 침입 느낌인데.
이거 무슨 좀비영화 시작인 줄.
[알림: 대상자는 미완의 소원을 완수해야 이월 조건을 충족합니다]
야, 뭔 소원.
누구 소원인데.
내가 방금 이 몸에 들어온 것도 억울한데 남의 숙제까지 하라고?
이게 무슨 전세 사기 당하고 보증금도 못 받았는데 관리비까지 내라는 소리야.
계약서도 안 보여주고 조건만 던지는 이 시스템, 진짜 갑질 제대로 하네.
[시스템은 질문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상태 창을 확인하십시오]
무시당했다.
기계음성 존재한테 무시당하는 기분, 생각보다 서럽더라.
콜센터 상담원한테 감정 이입 안 되던 내가 이제는 기계음성한테 서러움을 느끼는 날이 오다니.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상태 창이나 보자.
[이름: 이하준]
[힘: 3]
[민첩: 2]
[지능: 4]
[체력: 3]
[수의학: 87]
뭐야 이거.
다른 건 죽어가는데 수의학만 혼자 헬창처럼 근육 자랑을 하고 있었다.
무슨 편식하는 스탯창인지.
밸런스 패치 좀 해주세요, 개발자님.
힘 3에 민첩 2면 이거 거의 종이인형 아니냐.
바람 세게 불면 날아갈 수준의 스탯인데 수의학만 87이라니, 완전 한 우물만 판 장인이었나 보다.
일단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있다는 것부터 마음에 걸렸다.
감정불안정증에 수의학 87.
이 사람, 동물만 보면 눈에 빛이 나고 사람 앞에서는 얼음이 되는 그런 부류였을 것 같았다.
왜냐면 딱 그런 얼굴로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으니까.
무표정한데 강아지 안고 찍은 사진은 웃고 있었다.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액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진돗개, 고양이, 심지어 앵무새까지 안고 찍은 사진이 벽 한쪽을 도배하고 있었다.
근데 사람하고 같이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취향이 확고한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거 아닐까.
딱 봐도 인간관계는 개판이고 동물 관계는 만렙인 타입.
동질감이 좀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도 사람보다 넷플릭스가 더 편했으니까.
어쩌면 이 몸 주인이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거울을 봤다.
낯선 얼굴이 나를 마주 봤다.
이십대 후반, 마른 체형, 무표정.
그런데 눈이 이상했다.
왼쪽은 파랗고 오른쪽은 금색이었다.
오드아이라니.
이거 완전 만화 주인공 특전 아니냐.
근데 나는 이런 특전 받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그냥 인생 좀 재밌게 해달라고 한 거지 오드아이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다.
계약서에 없는 특약사항을 임의로 추가한 느낌, 완전 불공정 약관이었다.
[알림: 영혼의 잔상이 홍채에 발현되었습니다]
[이는 세계 이동의 흔적으로, 관찰자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출되면 어쩌라고, 콘택트렌즈 팔아?
이 세계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데.
설령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몸으로 안경점이나 렌즈 가게에 가는 것도 웃긴 상황이었다.
"저기, 오드아이 좀 가려주실 렌즈 있나요?" 하면 점원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일단 병원 안을 둘러봤다.
간판에 '하준동물병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작은 개인병원인데 대기실 벽에 붙은 진료 예약표를 보니 다음 예약이 곧이었다.
병원 내부는 생각보다 아기자기했다.
벽에는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고, 대기석에는 작은 강아지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원장이 인테리어에도 신경 좀 쓴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사람이 인간보다 동물 취향에 특화된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진료실 안쪽 선반에는 각종 약품과 처치 도구들이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칼같이 정리된 서랍장, 라벨까지 반듯하게 붙어 있는 걸 보니 이 사람 성격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동물 앞에서는 완벽주의자, 사람 앞에서는 얼음땡.
완전 캐릭터가 확실했다.
[다음 예약자: 강태현]
강태현?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흔한 이름이라 그런가 싶으면서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직감이라는 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딱 그거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간호조무사로 보이는 여자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원장님, 큰일 났어요! 강태현 씨가 벌써 도착했는데 복실이 상태가 심각해 보여요!"
목소리에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심각해 보인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강태현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방금 왜 끄덕였지.
몸이 알아서 반응한 건가.
뭔가 익숙한 절차인 것처럼.
이거 완전 몸에 새겨진 습관 같은 건가.
운전할 때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 밟는 것처럼, 이 몸도 뭔가 응급상황이라고 판단하면 알아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내 머릿속에는 이 병원 어디에 뭐가 있는지, 이 강아지가 무슨 병인지 아무 정보도 없다는 거였다.
몸은 준비됐는데 뇌는 아직 로딩 중인 상황.
[알림: 미완의 소원 조건이 지금부터 카운트됩니다]
뭔 조건인지도 안 알려주고 카운트만 시작하네.
이거 완전 자기소개 없이 계약서 던지는 대출업체 같은 거 아니냐.
최소한 이자율이랑 상환 기간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나도 소비자로서 항의할 권리가 있는데, 대체 누구한테 항의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나는 문을 향해 걸었다.
내 발이지만 내 발 같지 않은 그 걸음으로.
간호조무사 뒤를 따라 진료실을 나서는데, 대기실 쪽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실아, 조금만 참아, 조금만."
그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아직 복실이가 무슨 병인지도, 강태현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 목소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거 첫 진료부터 완전 하드모드인데, 나 진짜 수의사도 아닌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