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울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나무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걸 목격했다. 처음엔 곰인가 싶었다. 몸통의 비율이나 앞다리를 짚는 방식이 딱 그랬으니까. 그런데 곰이라면 저렇게 온몸이 검은 비늘로 뒤덮여 있을 리가 없었고, 눈이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일 리도 없었다. 그 네 개의 눈알이 전부 새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이게 학원 입학 전에 억지로 외웠던 도감 어딘가에서 본 이름이라는 걸 알아챘다.
'흑린곰.'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뒤따라온 건 위험 등급이었다. 최소 C급. 그것도 최소가.
'E등급 갓 각성한 신입이 C급 몬스터를 만나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건 무슨 확률 계산이냐, 나 로또 1등보다 이게 더 어려운 확률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상황을 부정한다고 해서 놈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흑린곰은 이미 나를 발견했고, 앞다리를 크게 들어 올리며 이쪽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몸집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쿠구구궁—!
땅이 흔들리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무릎까지 치솟아 올라왔다. 나는 그 진동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는데, 머리로 판단해서 움직인 게 아니라 몸이 먼저 굴러버린 느낌이었다. 놈의 발톱이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자리엔 마치 삽으로 파낸 것처럼 깊은 도랑이 생겼다. 저게 내 옆구리였으면 도랑이 아니라 무덤이 됐겠지, 하는 생각이 스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확 돋았다.
'죽는다, 이대로면.'
계산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그 계산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검을 고쳐 쥐고 놈의 옆구리를 향해 뛰어들었는데, 그 움직임이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발끝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검을 어느 각도로 눕혀야 비늘 사이의 틈을 파고들 수 있는지, 그런 걸 배운 적도 없는데 몸이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이런 전투를 해온 것처럼, 근육 하나하나가 저절로 최적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나 검술 배운 적 없는데.'
의문은 나중에 던지기로 하고, 일단 검을 박아넣었다.
콰크작!!
검이 비늘을 파고드는 감각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저릿하게 전해졌다. 비늘은 생각보다 단단했지만, 그 아래 살점까지는 어찌어찌 닿은 모양이었다. 흑린곰이 고통에 몸을 뒤틀며 포효했는데, 그 소리가 근처 나무들을 다 뒤흔들 만큼 컸다. 나는 그 소리에 잠깐 귀가 멍해졌고, 바로 그 틈을 놈이 놓치지 않았다.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고, 나는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옆구리를 정면으로 맞았다.
퍼억—!
갈비뼈가 부러지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가 나무 밑동에 부딪혔다. 등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잠깐 컥컥거렸다. 그 순간 시야 한켠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경고: 생명력이 42%로 감소했습니다.]
'…아프네, 그냥.'
담백하게 놀란 것도 잠시, 나는 바닥에 흐른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부러진 갈비뼈 쪽이 숨을 쉴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지만, 여기서 눕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흑린곰은 이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이 숲에서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등 뒤는 나무고, 옆은 절벽인지 뭔지 모를 급경사였고, 앞은 저 흑린곰이었다. 도망칠 구석이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지형이었다.
'그래, 죽더라도 한 방은 더 먹여야지.'
검을 다시 고쳐 쥐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조금 웃겼다. 이 상황에 이런 오기가 나오는 게 정상인가 싶었지만, 정상이든 아니든 지금은 그거밖에 할 게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은빛 섬광이 날아들었다.
촤악!
흑린곰의 앞다리 한쪽이 통째로 잘려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절단면에서 검붉은 체액이 튀어 올랐고, 놈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지면서 다시 한번 땅을 크게 울렸다. 나는 놀라서 그 섬광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봤는데, 거기엔 긴 파란 머리를 뒤로 넘긴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무표정했고,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유니폼을 입은 그녀의 손에는 은빛 대검이 들려 있었다. 그 대검이 자기 몸집만 한 크기였는데도, 그녀는 그걸 나뭇가지 다루듯 가볍게 쥐고 있었다.
'…뭐야, 저 사람은.'
그녀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흑린곰이 조금 전까지 이 숲을 통째로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저 여자가 등장하자마자 그 지배자가 갑자기 한 마리 부상당한 짐승으로 쪼그라든 느낌이었다. 마치 이 숲 자체가 그녀 앞에서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물러나 있어" 하고 그녀가 짧게 말했다. 존댓말도 아니었고, 걱정하는 기색도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신뢰가 갔다. 마치 그 말 한마디로 앞으로 벌어질 일이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확신에 가까운 어조였다.
나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사실 물러선 게 아니라 다리가 알아서 뒤로 끌려간 느낌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녀는 넘어진 흑린곰을 향해 다시 검을 겨눴는데, 그 자세가 어딘가 익숙했다. 방금 전 내가 저도 모르게 취했던 자세와, 각도만 다르고 본질은 비슷한.
촤아아악!!
단 한 번의 베기로 흑린곰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절단면이 놀랍도록 깨끗했다. 내가 그렇게 애를 써도 뚫지 못했던 비늘이, 저 여자한테는 그냥 두부처럼 잘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믿기지 않아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E등급인 나조차 반죽음이 될 뻔한 몬스터를, 저 여자는 단칼에 정리해버렸으니까. 방금까지 내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게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에게는 그저 잠깐의 산책 도중 마주친 잡초 정리 같은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방금 그 검, 어디서 배운 거야?"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방금 전까지 나는 이 검술을 배운 적조차 없었으니까. 몸이 저절로 움직인 거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대충 둘러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눈빛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그 시선이 나를 훑는 방식이,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등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대답하지. 저도 몰라요, 몸이 알아서 움직였어요, 라고 하면 정신병자로 보겠지.'
머릿속으로 몇 가지 변명을 굴려보는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은하" 하고 그녀가 짧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청명학원 2학년."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가듯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어디선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아니면 학원 게시판 같은 데서. 하지만 그게 어디서였는지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뒤돌아서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걸음걸이에 미련이랄 게 하나도 없었다.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제대로 봐줄게" 하는 말을 남긴 채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을 틈도 없었다.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순식간에 나무 사이로 사라져버렸으니까.
나는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시야 한켠의 시간 표시를 확인했다.
[제한 시간: 01시간 03분 남았습니다.]
각성은 이미 끝났으니 페널티는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표시가 여전히 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의아했다. 각성이 완료됐으면 이 시련도 끝난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는 거지. 부러진 갈비뼈가 여전히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그 숫자를 보며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 끝나지 않은 게 남아 있다는 뜻이었고, 그게 뭔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게 더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