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 안 하면 죽습니다

4화

청명학원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여전히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간 표시를 신경 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확히는 걸음이 아니라 거의 뛰다시피 했는데, 왜냐하면 그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흑암숲에서 이 표시를 봤을 때는 그냥 '남은 시간'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 표시는 '완전 각성'까지 남은 시한이었고, 완전 각성이란 학원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등급 관문' 시험을 한 번 통과해야 완료되는 절차였다. '…그러니까 피 흘려서 매개체 활성화시킨 건 튜토리얼이고,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거지?'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즉, 죽음의 페널티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오늘 안에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벌인 그 모든 사투가 그냥 시간을 조금 번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었다. '이게 뭔 끝판대장식 퀘스트냐'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허탈했지만, 동시에 웃음도 나왔다. 시한부 인생 살다가 갑자기 시한부 게임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으니, 이 정도면 인생 자체가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침 오늘이 학원 정기 관문 시험일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시험일이 어긋났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학원 사무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특별 시험을 열어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이 시험은 재학생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고, 통과 등급에 따라 학원 내 서열과 장학금이 정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이 시험을 딱 한 번 응시했다가 최하위 판정을 받고 다시는 도전하지 않았는데, 그때의 굴욕적인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감독관이 내 판정 결과를 읽으며 살짝 눈썹을 찌푸리던 그 표정, 뒤에서 들리던 옅은 비웃음, 그리고 순위표 맨 아래에 박제되었던 내 이름까지. 하지만 오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굴욕이든 뭐든,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는데 자존심을 챙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관문 시험장은 학원 지하에 있는 원형 투기장 형태의 공간이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구슬이 놓여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벽에 새겨진 과거 우수 응시자들의 명단이 눈에 들어왔는데, 하나같이 A등급 이상의 이름들이었다. 그 명단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나도 저기 이름 하나 남기면 재밌겠는데.' 물론 그때는 그게 정말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시험 방식은 간단했다. 수정 구슬에 손을 얹고 오라를 방출하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등급을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알림: 등급 관문 시험이 시작됩니다.] [측정 방식: 오라 방출량 및 제어력 종합 판정] 감독관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절차를 설명했고, 대기 줄에 서 있던 다른 학생들은 나를 힐끗거리며 수군댔다. 왜냐하면 나는 청명학원에서도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학생이었고, 이런 시험장에 발을 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누군가는 "저 사람 여기 왜 왔대?" 하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고, 또 누군가는 "저번에 최하위 받은 애 아니야?" 하며 낮게 웃었다.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대기 줄 끝에 서서 숨을 골랐다.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그게 긴장 때문인지 아직 몸속에 흑린곰의 잔재가 남아 날뛰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유독 더디게 느껴졌다. 내 앞에 서 있던 학생이 구슬에 손을 얹었을 때 옅은 초록색 빛이 잠깐 일었다가 사그라들었고, 감독관은 "D등급입니다, 다음" 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그 학생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리를 떴다. 흔한 결과였고, 흔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나도 저 정도면 다행이겠다' 하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등급 서열 따위 상관없었다. 그저 이 관문을 '통과'라는 판정만 받으면 됐으니까. "강도현 학생, 차례입니다" 하고 감독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수정 구슬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얹었다. 구슬 표면은 차가웠는데, 그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아직 각성이 미완성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만약 여기서 또 최하위 판정을 받는다면, 그 다음은 뭘 해야 할지 감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반지에 의식을 집중했고, 흑암숲에서 흑린곰을 상대할 때 느꼈던 그 뜨거운 흐름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 감각은 마치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것과 같았는데,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으로 시작해서 점점 손끝으로, 손바닥으로, 그리고 구슬 표면으로 번져나갔다. 손끝에서부터 청백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그 기운이 수정 구슬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치 물이 스펀지에 스며드는 것처럼, 구슬은 내가 밀어넣는 기운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위이이잉— 구슬이 진동하며 내부에서 새파란 빛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는데, 그 빛이 점점 강해지면서 시험장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살짝 흔들렸고, 바닥을 딛고 선 발밑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기하던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감독관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방금까지 무미건조하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측정 중... 측정 중... 측정 중...] 측정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 시스템도 나만큼이나 지금 벌어지는 일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으니까. 보통 다른 학생들의 측정은 몇 초면 끝났는데, 내 경우는 벌써 십수 초가 지나고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손바닥에서 구슬로 흘러 들어가는 기운의 흐름을 계속 느끼고 있었고,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게 오히려 불안했다. '설마 오라가 너무 많아서 오류라도 난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측정 완료.] [판정 등급: S] [※ 알림: 본 청명학원 개원 이래 최초의 S등급 판정입니다.] 순간 시험장 안이 완전히 정지한 것 같았다. 수군거림도, 감독관의 목소리도, 심지어 대기 줄에 서 있던 학생들의 숨소리조차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의 발이 바닥에 부딪혀 걸려 넘어질 뻔하며 나는 작은 소음이 들렸는데, 그 소음마저 시험장 전체의 정적을 더 깊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정적 속에서 허공에 떠 있는 'S등급'이라는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는데,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 E등급이었는데?' 하는 의문이 곧바로 떠올랐다. 흑암숲에서 판정받은 등급과 지금 이 판정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짐작이 갔다. 그때의 E등급은 '초기 각성 상태'의 판정이었고, 지금은 완전 각성을 향해가는 과정에서의 재판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즉 이 시스템은 성장하는 만큼 등급을 새로 매기는, 고정되지 않은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또 얼마나 더 오를 수 있다는 거지?' 하는 생각까지 미치자, 나는 이 상황이 기쁜 건지 두려운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알림: 완전 각성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제한 시간이 해제되었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마치 몸속에 매달려 있던 모래주머니가 한꺼번에 사라진 듯한 감각이었는데, 그 가벼움이 오히려 몸을 못 가누게 만들었다. 살았다. 정말로 살았다. 그 안도감이 얼마나 컸는지,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무릎이 후들거려서 구슬 받침대를 손으로 짚어야 했는데, 그 모습이 남들 눈에는 마치 감격에 겨워 그러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반쯤은 감격이었고, 반쯤은 정말로 다리가 풀린 것이었다. "저, 저기, 학생 이름이 강도현이라고 했나?" 하고 감독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학원 역사상 S등급은 이번이 처음인데... 혹시 어디 소속 각성자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무미건조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뭔가를 확인하려는 조급함과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급변한 태도가 낯설어서 잠깐 멈칫했다. "그냥... 여기 재학생인데요" 하고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감독관의 표정이 더 복잡해졌다. 그는 뭔가를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시험장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다음 학생을 호출했고, 나는 어색하게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여전히 수십 개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는데, 그 시선들 속에는 놀라움과 의심, 그리고 미묘한 경계심까지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존재감 없는 학생이라며 수군거리던 그 입들이,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시험장을 빠져나오면서도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S등급이라니. 흑린곰과 사투를 벌이며 겨우겨우 살아남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의 페널티에서 벗어난 것도 벅찬 일인데, 거기에 학원 최초의 S등급이라는 딱지까지 붙어버렸으니,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뒤틀릴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했다. 이 S등급 판정 기록이 학원 서버에 저장되는 순간, 그 정보가 자동으로 각성자 관리국 중앙 시스템에 전송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정보를 받아본 이들이 앞으로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지, 나는 그때까지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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