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혼약을 파기할 유일한 방법이 자신의 순결을 스스로 내던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서연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그 계획의 세부를 다듬어야 했는데, 촛불이 사그라들 때까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천장을 노려보았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을 서늘하게 물들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문밖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 물음 앞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였는데, 함부로 아무나 방으로 들일 수도 없었을뿐더러, 그 상대가 입을 함부로 놀리는 자라면 계획 전체가 물거품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비를 서는 이들은 안 돼. 그들은 이미 그 노인의 손에 목줄이 매어 있는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시종들은? 아니, 그들은 어머니의 눈과 입을 대신하는 자들이니 더더욱 안 되지.'
그렇게 하나씩 지워나가던 이름들 앞에서 서연은 몇 번이고 손끝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삼켰는데, 저택 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노인이나 어머니 채경의 그늘 아래 있었으므로,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해 침묵을 지켜줄 사람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기준으로 저택 안의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을 때, 결국 남는 이름은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마구간의 도윤이었다.
그는 이 저택에 들어온 지 삼 년이 넘었으나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고, 다른 하인들 사이에서도 그저 성실하고 조용한 사람으로만 통했으며, 그 침묵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서연이 그를 처음 눈여겨보게 된 것은 지난봄, 다리를 다친 망아지 한 마리가 마구간 구석에서 떨고 있던 날이었는데, 다른 하인들은 그 짐승을 곧 내다 버릴 것처럼 수군거리며 지나쳤으나, 도윤만은 밤이 늦도록 그 곁에 앉아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었더랬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망아지에게 건넨 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으나, 담벼락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연의 가슴을 이상하게도 뻐근하게 만들었고, 그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구간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늘어났다.
서연은 그 침묵이 곧 안전을 의미한다고 판단했으나, 사실 그 계산 안에는 또 다른 감정이 조용히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다친 망아지를 돌보던 그 손길을 다시 보고 싶다는,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낯선 갈망이었다.
'그저 안전한 상대이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었으나, 그 다짐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그것이 거짓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 같아서, 서연은 결국 그 생각을 서둘러 지워버리고 말았다.
계획을 세우는 내내 서연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저택 안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주도권이자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길 위에 놓여 있었으니, 청하 가문의 딸이라는 이름은 축복이 아니라 굴레였고, 그 굴레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만큼이나 나이 많은 그 노인이었으며, 그와의 혼약이 성사되던 날 서연은 자신의 의견을 단 한 마디도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나는 그 노인의 것이 되어야 해.'
그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그녀는 도윤을 불러들일 날을 정했고, 그날이 다가올수록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으나, 이미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유모에게조차 이 계획을 알리지 않았는데, 유모가 아무리 자신을 아낀다 해도 결국은 어머니 채경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이 일이 새어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리라는 것을 서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손수 짧은 서찰을 적어 마구간으로 심부름 가는 어린 하녀의 손에 몰래 쥐여주었고, 그 서찰이 도윤의 손에 무사히 전해졌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어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며 지내야 했다.
똑, 똑.
밤이 깊어 창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에도 서연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그저 바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서야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눕혔으나,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편 이 저택의 후원을 받는 사찰에는 법현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청하 가문의 안녕을 빈다는 명목으로 종종 저택을 드나들었으나, 그 방문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서연의 어머니인 채경뿐이었다.
법현이 처음 저택에 발을 들인 것은 서연의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그는 매달 초하루마다 향을 피우고 경을 읽으며 가문의 무사함을 빌었고, 그 정갈한 목소리와 단정한 몸가짐은 저택의 하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을 만큼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정갈함 뒤에 숨겨진 얼굴을 아는 사람은 오직 채경뿐이었으니, 법현과 채경 사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몰래 이어져 온 밀회가 있었고, 그 관계는 승려라는 신분과 부인이라는 신분이 만들어내는 위태로운 균형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마음을 나누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채경이 남편의 병간호에 지쳐 몰래 사찰을 찾았던 어느 밤, 법현이 그녀의 손을 잡고 "부인의 슬픔은 부인의 죄가 아닙니다……" 하고 속삭였던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는 것을,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법현의 방문은 점점 더 잦아졌고, 저택의 하인들은 그 방문이 순전히 불심에서 나온 것이라 믿었으나, 채경은 그가 오는 날마다 몸단장을 새로이 하고 향을 덧발랐으며, 그 은밀한 습관이 언제 누구의 눈에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결코 멈추지 못했다.
그 균형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저택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비밀이란 것은 언젠가 반드시 새어나가기 마련이었고, 그 사실을 채경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이미 깊어진 정을 스스로 끊어낼 만큼의 냉정함은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서연이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 그 시각, 저택의 다른 편에서는 이미 다른 종류의 욕망이 조용히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 앞에 놓인 절박한 선택만을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정한 날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저택 안의 공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으나, 서연의 눈에는 그 모든 평온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는데, 자신만이 이 조용한 저택 안에서 폭풍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홀로 절벽 끝에 선 듯한 아득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밤이 되었을 때, 서연은 방문 앞에 서서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그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발소리가 도윤의 것인지, 혹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아챈 누군가의 것인지 알 수 없어, 차마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