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벌가의 씨받이

3화

딸랑, 휴대폰 진동이 다시 울렸을 때 나는 이미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액정에 뜬 이름이 지원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부터 손끝이 미리 저려오는 느낌이었다. 받자마자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의 지원이 같지 않았다. 뭔가에 짓눌린 듯 낮고, 끝이 잘게 흔들렸다. "언니, 나 어떡하지." 지원이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현우씨 회사가 갑자기 거래 은행에서 대출을 전액 회수한다고 통보받았대. 이유도 없이." 지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등줄기로 소름이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이유 없는 대출 회수 같은 건 없다. 최소한 이 세계에서는. 은행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안다. 서류 한 장, 도장 하나에도 몇 겹의 절차와 명분이 필요한 곳. 그런 곳에서 이유도 없이 돈을 거둬간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한마디가 그 절차를 통째로 건너뛰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야?" 내가 묻자 지원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난주부터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고 답했다. 광고 계약이 하나둘 취소되고, 오래 거래하던 인쇄소에서도 이유 없이 납품을 미루고, 마지막으로 은행에서 통보가 온 게 오늘 아침이라고 했다. 하나씩 하나씩,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짜놓은 순서처럼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쥔 채 창밖을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이 우연일 리 없다는 직감이 목을 조여오는 걸 느꼈다. 강태오.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다. 얼마 전 그가 통화하며 지나가듯 뱉었던 말이 뒤늦게 귓가에 울렸다. 서재 문틈으로 얼핏 들었던 그 낮은 목소리. "그 광고 회사, 아직도 그 자리에 있나."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건 결코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 무슨 회사를 말하는 건지 그때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이제야 그 한마디의 무게가 뒤늦게 뒤통수를 후려쳤다. "언니, 듣고 있어?" 지원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붙잡았다. "어, 듣고 있어. 걱정 마, 내가 알아볼게."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알아본다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지원이를 더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뭐라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야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지원이는 지금 임신 중이다. 배가 겨우 조금 불러오기 시작한, 아직 조심해야 할 시기. 남편의 사업이 무너지면 그 충격이 곧바로 지원이에게 향할 거라는 걸, 나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태아에게 얼마나 나쁜지, 임신 중인 몸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나는 병원에서 들은 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나는 곧장 옷을 챙겨 입었다. 손끝이 떨려 셔츠 단추를 두 번이나 다시 채워야 했다. 재킷을 걸치는 손도 자꾸만 헛돌아서, 결국 소매 하나를 반대로 껴넣었다가 다시 벗어 고쳐 입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강태오를 만나야 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 강일홀딩스 본사 로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손바닥에 땀이 배어드는 걸 느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유리로 된 로비는 서늘할 만큼 넓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또각또각 울렸다. 비서실 앞에서 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야 겨우 강태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서는 나를 힐끗 훑어보며 "회장님 지금 일정이 빠듯하셔서" 어쩌고 하는 말을 흘렸지만, 나는 대꾸할 여유도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는 책상 너머에서 서류를 넘기다가 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시선 하나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여긴 왜." 그가 물었다. 짧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현우씨 회사 대출, 당신이 한 거예요?"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물었다. 두 손을 마주 잡아 손끝의 떨림을 숨기려 했지만, 손바닥에 배어난 땀이 계속 미끈거렸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대답 대신 서류를 덮었다. 딱, 소리를 내며 서류가 닫히는 그 순간, 그 무응답이 이미 대답이었다. "왜 그랬어요. 지원이는 지금 애를 가졌는데." 목이 메는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무슨 이유로." 강태오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당신이 나설 자리는 아닌데." 그 한마디가 가슴에 박히는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 앞에서도 하지 못했던 말을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뱉었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면, 누구 자리인데요. 나 당신 아내잖아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가르며 서늘하게 내려앉았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정말로 무너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 안쪽이 뜨겁게 조여오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버지 서재 문 앞에서 발끝으로 서 있던 여덟 살의 나와, 지금 이 자리에서 떨고 있는 서른 살의 내가 겹쳐지며,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어깨가 들썩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엄마, 일어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상관없는 오래된 기억이었다. 병원 침대 옆에서 엄마의 손을 붙잡고 울었던 그날의 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던 그 좁은 병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방 안에서 홀로 무너졌던 그 순간이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되살아난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어깨를 떨었고, 강태오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카펫 위로 낮게 울리며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손길이었다. 나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그가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아주 잠깐이지만, 뭔가 다른 온도가 느껴졌다. 겨울바람처럼 시리던 그 특유의 기운 속에 아주 작은 틈, 미묘하게 다른 결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어깨에 닿은 손끝만큼은 조심스러웠다. 순간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 온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한마디가 내 가슴 한복판을 얼음처럼 찍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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