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나 정상이 아니야

2화

"여보세요." 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귀에 붙이는 순간, 반대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은 채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새어 나왔고, 나는 그 침묵의 길이만큼 손끝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고, 낮에 걸려온 전화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이 시간에 걸려오는 낯선 번호는 늘 좋지 않은 예감을 몰고 왔다. 나는 소파에 반쯤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고, 텔레비전 리모컨을 든 손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잠시 후, 낮게 흐트러진 숨소리가 섞여 들리는가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걸어오는 듯 흐릿하게 새어 나왔다. "오빠..." 그 한마디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고, '수아잖아' 하는 생각과 함께 몸이 먼저 반응해 신발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소의 수아라면 전화를 걸어놓고도 장난스럽게 "오빠 나 누군지 알아?" 하며 웃음기를 섞었을 텐데,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그런 여유가 조금도 없었고, 대신 뭔가에 짓눌린 듯한,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무게만 실려 있었다. "수아야, 너 어디야. 이 번호 뭐야." 내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저편에서는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숨소리만 몇 번 이어지다가, "그냥... 오빠가 받을까 봐..." 하는 말이 뚝, 끊어졌다. 뚜ㅡ뚜ㅡ. 통화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겼고, 나는 발신 번호를 눌러 다시 걸어보았지만 신호음조차 울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리다이얼 버튼을 눌러댔는지 모른다. 화면에는 낯선 국번의 숫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그 숫자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나는 어느 순간 그 배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공중전화잖아, 이건..' 하는 생각이 스치자 손끝에서부터 오싹한 기운이 올라왔고, 나는 코트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로 현관을 나섰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차가운 계단을 딛는 순간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고,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어 내려가며 수아가 자주 다니던 길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회사 근처 버스정류장, 자취방으로 가는 골목,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 그리고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자주 앉아 있던 강변 산책로까지, 나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장소들이 지도처럼 펼쳐졌다가 지워지길 반복했고, 그중에서도 유독 강변 산책로 한 자리가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아가 힘들 때마다 발걸음을 옮기던 곳,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니던 그 벤치. 다다다다다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고,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이어진 밤길을 가로지르는 동안 내 숨소리와 발소리만이 골목을 채웠다. 편의점을 지나칠 때 유리문 안쪽에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 아르바이트생의 시선도, 취객이 비틀거리며 부딪치는 어깨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삼십 분쯤 그렇게 헤맨 끝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파올 즈음, 강변 벤치 한구석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회색 트렌치코트를 발견했다. 우뚝!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달려갔다. "수아야!" 내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흔적이 허옇게 남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화장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손으로 가리며 웃어넘길 아이였는데, 지금은 그런 부끄러움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오빠가... 왜 왔어.." 그녀가 웃으려 애쓰며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고 나는 그 웃음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는 듯한 눈동자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고, 그녀는 순간 몸을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옆에 앉아 등을 토닥였다. 손바닥에 닿는 어깨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냉기가 코트를 통해서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 밤공기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나기도 했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에 가자." 내가 그렇게만 말하자,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천천히 걸어 자취방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내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그녀의 걸음 속도에 맞춰 발을 옮겼다. 가끔 그녀가 휘청거릴 때마다 나는 팔을 붙잡아주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몸이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졌다는 걸 느끼고 속으로 흠칫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야위었던 걸까.. 나는 그걸 왜 이제야 눈치챈 걸까. 집에 도착해서 따뜻한 물을 끓여 손에 쥐여주는 동안에도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문장의 첫 글자만 썼다가 지우는 사람 같아서, 나는 조급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저 기다렸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이 그녀의 얼굴 앞을 가리며 흩어졌고, 그 김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을 잃은 채였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그녀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리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수아야, 무슨 일 있었어. 말해봐, 오빠한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러다가 한참의 침묵 끝에, "오빠, 나 사실..." 그녀가 드디어 입을 떼는 순간,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옆으로 스르르 기울었다. 탁!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그녀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수아는 이미 눈을 감은 채 미약하게 숨만 내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찰나, 나는 그녀를 등에 업고 다시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마다 등에 업힌 몸이 힘없이 흔들렸고, 그 무게가 조금 전 걸을 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가 마저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붙잡은 채 어두운 골목을 향해 소리를 지르듯 병원 이름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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