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나 정상이 아니야

4화

[말은 언제나 정성이 담긴 협박처럼 걸려온다. "다 너를 위해서야."] 어머니의 전화는 늘 저녁 여덟 시쯤 정확히 걸려왔고, 마치 시계추처럼 규칙적이어서 오히려 그 규칙성이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그날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수아의 집에서 함께 늦은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그녀가 끓인 된장국에서 올라오는 김이 식탁 위로 뭉글뭉글 퍼지는 걸 보며 숟가락을 들었던 순간,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리며 액정에 "엄마"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수아의 표정이 바뀌는 데는 채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나를 보며 웃고 있던 얼굴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부터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변화를 젓가락질을 멈춘 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나 지금 밥 먹는 중인데.." 수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어머니 쪽의 목소리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는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말들이 이따금 내 귀에까지 새어 들었는데, "그 집 아들이 얼마나 착실한데", "여자가 혼자 오래 살면 안 좋은 소리 나온다", "네 나이가 지금 몇인데" 같은 구절들이었다. 그 말들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수아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드는 게 보였고, 나는 그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국그릇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전화를 끊은 수아는 한동안 젓가락을 든 채 밥공기만 내려다보았다. 밥알 몇 개가 젓가락 끝에 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또 소개팅?"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입꼬리만 겨우 끌어올린 표정이었다. "이번엔 진짜 안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엄마가 벌써 상대방 쪽에 날짜까지 정해놨대. 다음 주 토요일이라나."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무언가 뻐근한 것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명치 아래쯤 어디선가 뜨거운 것이 뭉쳐 올라오는 느낌이었는데, 그걸 애써 삼키며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싫으면 안 나가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그 말이 아무 힘도 없다는 걸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수아의 어머니는 딸의 "싫다"는 말을 한 번도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며칠 뒤, 나는 무심코 실수를 했다. 저녁 자리에서,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배경음처럼 흘려들으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던 중이었는데, "차라리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사람 일이란 게.." 하고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별생각 없이, 정말 아무 무게도 없다는 듯 흘려버린 말이었는데, 뱉고 나서야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수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언가 배신당한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뱉어진 뒤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서둘러 말을 고치려 했지만, 문장은 입 안에서 뒤엉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고, 등을 돌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던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고, 그 불빛을 등지고 선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켜만 보았다. 우리 사이엔 한동안 정적만 흘렀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벽시계 초침 소리 같은 것들이 유난히 크게 들리던 밤이었다. 결국 수아는 그 주 주말, 어머니가 정해준 자리에 나갔다. 나는 그날 오후 내내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별다른 연락이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면을 몇 번이고 켰다가 껐다가 했고, 창밖으로 해가 기울어가는 걸 보며 시계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섯 시, 일곱 시, 여덟 시... 시간은 지독하게 천천히 흘렀다.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그녀에게서 짧은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끝났어.] 그 세 글자뿐이었다. 그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는데,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손끝으로 액정을 쓸어보았다. 내가 부랴부랴 그녀의 집으로 갔을 때, 수아는 화장이 반쯤 지워진 얼굴로 현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신발도 다 벗지 않은 채, 한쪽 발엔 스타킹만 신은 상태로 무릎 위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래?" 내가 묻자 그녀는 픽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예의 바르게 좋은 사람 만나시라고, 자기랑은 안 맞는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나는 그 떨림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손톱 끝이 자꾸만 무릎 위 원단을 긁어대는 것을, 그 반복되는 동작 속에 감춰진 무언가를 나는 애써 모른 척하지 않기로 했다. "수아야." 내가 그녀 옆에 앉으며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낮게 내뱉었다. "오빠, 나 진짜 이상한 건가 봐." 그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버렸다. 현관 등의 노란 불빛 아래서, 그녀의 옆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게 보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으로는 수십 개의 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정작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무겁게 흘렀는데, 수아는 그 침묵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듯 짧게 웃으며 말을 삼켜버렸다. "아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그 뒷모습을 붙잡을 타이밍을 놓친 채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녀의 방 소파에서 밤을 지새웠다.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는데, 방문 너머로 수아가 뒤척이는 소리, 이따금 낮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자꾸만 어머니의 말투와 수아의 굳은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수아의 어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여자가 혼자 오래 살면 안 좋은 소리 나온다"는 그 말이,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어떤 확신에서 나온 말처럼 들렸던 것도 이제 와서야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무언가가 있어. 저 애가 계속 삼키고 있는 게, 단순히 연애가 안 풀려서가 아닌 것 같아..' 하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소파의 낡은 스프링이 뒤척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맞춰 내 생각도 자꾸만 삐걱거리며 어딘가 맞지 않는 곳으로 흘러갔다. 새벽 세 시쯤, 방문이 아주 조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걱ㅡ 나는 자는 척 눈을 감았지만, 실은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든 실내등 불빛 속에서, 수아가 한참을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시선의 무게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소개팅이 싫어서 나온 눈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문은 다시 조용히 닫혔고, 나는 그날 밤새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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