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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리안은 그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서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교문 옆 담벼락 그늘 아래, 셋의 그림자가 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 바람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뭘 숨겼냐고." "아무것도 안 숨겼어." "그럼 그 종이는 뭐야." 리안의 손가락이 서준의 가방을 가리켰다. 서준은 가방끈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서는 게 보일 정도였다. "과제야." "과제가 왜 그렇게 급하게 숨겨." "안 숨겼어." 리안의 눈썹이 한쪽만 슬쩍 올라갔다. 그 표정 하나에 서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 표정이 제일 무서운데.' 수아만큼이나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리안은 잠시 서준을 응시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 서준은 세지도 못했다. "됐어. 그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학교 밖에 왜 있어." "그냥 산책." "수업 시간 아니야?" "쉬는 시간이야." 태오가 옆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붕대를 감은 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태오구나. 또 다쳤네." 리안의 시선이 태오의 붕대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서준에게로 돌아왔다. 태오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붕대 감긴 손을 뒤로 슬쩍 숨겼다. 그 여유가 서준의 눈에는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번엔 뭐였어?" "계단에서 좀." "넌 계단이랑 무슨 원수라도 졌니." 태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피하자, 리안은 더 캐묻지 않고 다시 서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옮겨 가는 짧은 순간,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수아한테는 말 안 할게. 대신 다음에 머리 좀 자르러 와." "머리 방금 잘랐잖아." "방금은 무슨, 벌써 이 주 지났어." 서준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반항은 더 큰 의심을 부를 뿐이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리안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카락도 이렇게 자라는데, 넌 왜 하나도 안 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키 말이야. 작년이랑 똑같잖아." 서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랐어. 삼 센티나." "어디서, 신발 굽에서?" 태오가 옆에서 픽 웃음을 터뜨렸다가 리안의 눈초리에 재빨리 표정을 지웠다. 리안이 자리를 뜨자 서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았다. 발끝부터 스르르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큰일 날 뻔했다." "진짜." 태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타타닥 두드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서준은 그 여유가 얄미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넌 안 무서워? 방금 진짜 들킬 뻔했는데." "뭘 들켜. 종이는 가방 안에 있잖아." "그러니까 위험했다는 거지." "괜찮아, 안 걸렸으니까." 태오의 태평한 대답에 서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심장이 아직도 벌렁거리는 자신과 달리, 태오는 벌써 다음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있었다. 서준은 가방 속 종이를 다시 확인했다. 다음 유혹 대상의 이름과 정보가 적힌 메모였다. '서은이라니. 이름부터 어렵게 생겼네.' 접근 방법을 다시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서준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서준은 평소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현관문을 열 때부터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수아의 훈련 시간이 예고 없이 다가왔다. "오늘부터 오백 개." "뭐?" "사백에서 오백으로 늘렸어." 서준의 눈이 커졌다.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왜 갑자기." "몸이 늘어졌어." "안 늘어졌는데." "내 눈에는 늘어졌어." 수아의 말투에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서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지만, 결국 그 시선이 향할 곳은 매트뿐이었다. "사백오십은 안 돼?" "오백." "사백구십구는." "오백." 숫자 놀이는 언제나 수아의 승리로 끝났다. 서준은 결국 매트 위에 엎드려 운동을 시작했다. 첫 백 개는 그나마 수월했다. 이백을 넘어가면서부터 팔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삼백 개째, 서준의 팔꿈치가 파삭 꺾이듯 매트에 닿았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 "똑바로 안 해?" "하고 있어." "자세 흐트러졌잖아." "눈이 좋으시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 다른 생각이 오갔다. '자유시간 조항이 통해야 하는데.' '다음 유혹 대상은 언제 접근해야 하지.' '수아 누나가 정말 눈치챈 건 아니겠지.' 땀이 눈썹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사백을 넘길 때쯤엔 이미 팔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수아는 그 옆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기계처럼 일정했고, 그 일정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사백구십팔, 사백구십구, 오백." 서준은 마지막 개수를 채우자마자 그대로 매트 위로 무너져 내렸다. 숨소리가 거칠게 방 안을 채웠다.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죽을 것 같았어." "그럼 다음엔 육백." "그건 진짜 죽으라는 거잖아." 수아는 대답 없이 픽 웃었다. 그 웃음이 서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운동이 끝난 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서준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온몸이 뻐근했지만 이제 익숙한 통증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이불을 적셨다. 휴대폰을 확인하려는데, 마침 방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였다. 수아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표정 없는 얼굴로. "핸드폰 좀 줘봐." 서준의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몸을 채우던 뻐근함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왜, 왜 갑자기." "보여줄 거 있어서 그래." "뭘 보여주는데." "영양제 앱 알려주려고." 서준은 그 말이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수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유난히 날카로웠다. '설마 확인하려는 건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방금까지 태오와 나눈 대화, 그 안에 적힌 이름 하나가 화면 어딘가에 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그런 앱이면 나중에 보여줘도 되잖아." "지금 보여줄게." "내가 나중에 물어볼게." "지금 궁금하니까 지금 보자." 수아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틈도 없었다.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서준은 이미 오백 개의 운동으로 배운 뒤였다. 서준은 휴대폰을 이불 속에 밀어넣으려 했지만, 이미 수아의 손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안 줘?" "주, 줄게." 서준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건넸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화면에는 아직 태오와 나눈 마지막 대화창이 떠 있었다. [다음 대상은 서은이야. 내일 준비해.] 수아의 손가락이 화면을 향해 뻗는 순간, 서준의 숨이 그대로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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