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내가 부른, 옛 여자

3화

사흘 뒤, 회사 거래처가 마련한 저녁 자리였다.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다이닝, 통유리 너머로 야경이 내려다보이고 벽면을 가득 채운 와인 셀러 사이로 낮게 흐르는 재즈 선율이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은채는 오늘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미팅이 있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던 것도 같다. 이런 자리는 늘 피곤했으니까. 거래처 팀장이 와인을 따라주며 신제품 라인업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적당한 리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런 자리가 늘 그렇듯, 대화는 겉돌았고 진짜 이야기는 술이 두 병쯤 비워진 뒤에야 시작될 것이었다. 그런 흐름을 알기에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강태희가 있었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옆 테이블에서 다른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가 자리를 옮겨왔을 때에야 나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어라?"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잔을 든 손끝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준호 씨, 맞죠?" 나는 숨을 삼켰다.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는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귓속에서 재즈 선율이 갑자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얼굴로, 낯선 사람을 대하는 목소리로. 태희는 명함을 받아들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의 결이 예전 그대로였다. 사람을 가늠하고, 즐기고, 서서히 조여오는 그런 방식. 명함을 손끝으로 매만지는 그 동작조차 낯설지 않았다. "명함까지 주시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녀가 자리를 살짝 옮겨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제가 아는 얼굴이랑 많이 닮으셨어서요. 혹시 예전에 홍대 쪽에서 일하신 적 있으세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요." 나는 짐작건대 목소리가 지나치게 빠르게 나갔다는 걸 알았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요? 이상하네." 태희는 와인 잔을 돌리며 나를 응시했다. 잔 속에서 붉은 액체가 조용히 원을 그렸다. 그 눈빛은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했다. "닮아도 참 이렇게 닮을 수가 있나. 목소리도 그렇고, 저 왼쪽 손목 움직이는 버릇도." 가슴이 철렁했다. 왼쪽 손목.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사람 얼굴이야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그녀가 봤을지 궁금했다. 웃음을 짓는 데에도 근육이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태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마치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대화는 이어졌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오간 대부분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태희는 지금 무슨 사업을 하고, 어느 지역에 건물을 몇 개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흘렸지만, 그 말들 사이사이 그녀의 시선은 계속 내 손과 목덜미를 훑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소유권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처럼. 예전에도 그랬다. 내 옷차림, 내 걸음걸이, 내가 누구와 눈을 맞추는지까지 그녀는 늘 확인했다. 그것을 관심이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고, 그것이 통제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많은 것이 부서진 뒤였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하루의 기분이 결정되었고, 그녀가 웃으면 세상이 괜찮아 보였고, 그녀가 침묵하면 숨이 막혔다. 이번 생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나를 맞추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다시는. 거래처 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태희가 몸을 살짝 기울여왔다. 향수 냄새가 예전과 똑같았다. 그 익숙함이 오히려 소름을 돋게 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녀가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인연은 한 번 끊어져도 다시 이어지는 법이라고 믿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도 돼요, 지금은." 그녀는 명함을 다시 확인하며 씩 웃었다. 그 웃음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 "연락드릴게요, 준호 씨."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걸어갔다. 걸음걸이마저도 예전 그대로였다. 남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모두가 자신을 보게 만드는 걸음. 나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자리를 뜨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잔을 들었다 놓았다만 반복했다.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무슨 소리지? 단순한 사업적 인사말일까? 아니면 그녀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던 걸까. 확신? 뭘? 그녀는 내가 그날 로비에서 얼음처럼 굳었던 순간을, 아마 그때 이미 알아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우연이 아니라는 것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저녁 자리에 그녀 같은 사람이 초대받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그녀를 이 자리에 끌어들였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누가. 거래처 팀장이 돌아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잔에 남은 와인이 조명을 받아 붉게 흔들렸고, 나는 그 붉음 속에서 자꾸 태희의 손끝을 떠올렸다. 자리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나는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겨울밤의 공기가 폐 속까지 차갑게 들어찼다. 그 냉기가 오히려 반가웠다.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붙잡아줄 수 있는 건 그런 물리적인 감각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명함을 받았던 그녀의 손끝을 계속 떠올렸다. 예전처럼 소유하듯, 확인하듯 나를 훑던 그 눈빛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규칙적으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명멸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휴대폰을 꺼내 은채에게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오늘 저녁 자리에서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 여자가 이상한 말을 하고 갔다고,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그 문장을 완성하는 순간 내가 숨겨온 모든 것이 함께 드러날 것 같았다. 타협점?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애초에 타협이라는 단어가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고, 나는 언제나 그것을 내주는 쪽이었다. 그 구도가 이제 와서 다시 시작된다면, 나는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서 있어야 했다. 택시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창밖으로 낯익은 골목이 보였다. 은채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러나 화면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녀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연락드릴게요, 준호 씨.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연락을 할 것이다. 그건 확신이었다. 문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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