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사업 관계로 몇 번." 나는 겨우 그 말을 짜냈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거짓말이라는 것도, 진실이라는 것도 결국 정도의 문제였다. 나는 그 경계선 위에 겨우 발끝을 걸치고 서 있었다.
은채는 그 대답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은 느렸고, 그 느림 속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화가 났다면 저렇게 걷지 않는다. 저건, 생각을 정리하는 걸음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저녁 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나는 그 실루엣만으로도 그녀 안에서 뭔가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세듯 숨을 골랐다.
"강태희." 은채가 그 이름을 다시 곱씹듯 뱉었다.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이렇게 다시 마주치다니."
이름 하나에도 무게가 있었다. 은채의 입에서 나온 그 두 글자는 마치 오래 묵혀둔 칼을 다시 꺼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당신, 괜찮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십일 년 전의 어느 여름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아직 유흥업소에서 벗어나지 못한 열여덟이었고, 강태희는 그곳의 고정 손님으로 나타났다. 첫 만남부터 그녀는 다른 손님들과 달랐고, 나는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 앞에서 몇 번이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 어느 밤,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관계는 조금씩 변했다. 손님과 손님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애매하고 미묘한 감정의 결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여덟 달이었지만,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은채에게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돌아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내가 예상했던 분노나 상처 대신, 낯선 종류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흥미. 혹은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
무슨 표정이지, 저건?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혼하고 삼 년, 나는 은채의 웃음과 찡그림과 지루함까지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은,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여자, 어떤 사람이었어? 사업 관계라고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 표정이 그날 로비에서 완전히 굳었었잖아."
로비에서의 그 순간이 다시 눈앞에 그려졌다. 강태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그 몇 초, 나는 분명 숨을 멈췄었다. 은채는 그 몇 초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말을 고르며 침을 삼켰다. "그냥... 아는 사이였어. 예전에."
"예전에 얼마나?"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짧은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초침 소리가 다시 커졌다.
얼마나, 라고 물으면 나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몇 개월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여덟 달이 내 열여덟 시절의 전부를 차지했다고 해야 할까.
은채는 그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인 듯,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섰다.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늘 쓰던 것과 같은 향인데, 오늘은 그 향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끝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고,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는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재밌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를 괴롭혔던 여자가, 내 남편이랑 아는 사이였다는 거."
나를 괴롭혔던 여자.
그 말이 뒤늦게 내 머릿속에 박혔다. 나는 그동안 은채와 강태희가 어떤 사이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은채가 예전에 어떤 여자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것,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하필이면 강태희였다니.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 있나. 아니, 좁은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그 좁은 틈을 비틀어 만든 것 같았다.
"은채야."
"화내지 마."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나 지금 화 안 났어."
"그럼 뭔데."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화를 냈다면, 나는 사과하고 무릎을 꿇고 진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사과할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그려두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화가 아니라, 뭔가 다른, 훨씬 위태로운 열기였다.
타협점?
아니다. 이건 협상이 아니었다. 은채는 지금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 다시 만나." 은채가 말했다. 명령처럼.
"뭐?"
"만나서, 어떤 사이였는지 나한테 다 보여줘."
나는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처음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라니, 보여달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머릿속에서 조합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한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식는 걸 느꼈다.
그녀는 지금, 나와 태희 사이의 과거를 그저 알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재현시키고 싶어 했다. 자신을 괴롭혔던 여자와, 자신이 구해낸 남자 사이의 관계를, 자신의 눈앞에서.
구해낸 남자.
그 표현이 맞을까. 나는 은채와 결혼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고, 어쩌면 그녀 말대로 어떤 궁지에서 벗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구원받은 게 아니라 다시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진짜로 하는 말이야?" 나는 겨우 물었다.
"응." 은채는 웃었다. 그 웃음이 그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나, 그 여자가 어떤 얼굴로 무너지는지 보고 싶어. 그리고 당신이 그 여자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는지도."
무너지는 얼굴이라니. 은채는 강태희에게 그 정도의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원한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더 복잡하고 뒤틀린 감정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걸까.
나는 그녀를 오래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녀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지나간 일이니까 더 궁금한 거야." 은채는 손끝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섰다. "당신이 그 여자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나는 아직 못 봤잖아."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제정신이지. 아주 멀쩡해."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당신이 겁먹은 거 보니까 알겠네. 뭔가 더 있었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하는 순간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증거가 될 것 같았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저물고,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조명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은채의 눈빛만이 유일하게 빛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빛이, 앞으로 우리 세 사람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번 생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과거의 그림자에 다시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던 시간들이, 지금 이 한순간에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강태희였다. 화면에 뜬 그 이름을, 은채가 나보다 먼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화면 위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