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를 숨기기로 했다

3화

다음 날 아침, 다인이 물통과 삶은 감자 몇 알을 들고 폐가에 들어섰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뒤집힌 나무통과 사방에 흩어진 지푸라기, 그리고 그 한복판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인헌이었다. 마치 폭풍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아서, 다인은 문지방을 넘다 말고 그대로 멈춰 섰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 물건은 무엇에 쓰는 것인가." 인헌이 다인이 어제 두고 간 낡은 손전등을 가리키며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곤혹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손전등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뭔가를 발견하려는 듯 미간을 좁히는 모습이, 마치 처음 보는 병기라도 감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인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참으며 손전등을 집어 스위치를 눌러 보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켜지자 인헌은 흠칫 물러섰는데, 그 모습이 마치 처음 불을 본 사람처럼 순진해 보여서 다인은 속으로 '왕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놀랄 일인가'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이 손전등 하나에 이토록 진지하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웃음과 함께 알 수 없는 안심 같은 것이 함께 밀려왔다. "이건 불빛을 내는 도구예요. 당신네 나라엔 없나요?" "……청명국에는 손바닥의 빛으로 밤을 밝히는 술사가 따로 있다." 인헌은 자존심이 상한 듯 턱을 치켜들며 말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손전등에서 떠나지 못했다. 다인은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아니, 귀엽다는 표현은 좀 이상한가, 하며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를 두고 귀엽다는 말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딘가 잘못된 일 같아서, 그녀는 애써 감자가 든 봉투를 부엌 쪽으로 옮기며 딴생각을 밀어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인헌이 부엌 한쪽에 있던 라디오를 만지다가 볼륨을 최대로 올려버린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인헌은 그것을 벽에 던져버렸고, 우당탕 하는 소리가 폐가 안을 흔들었다. 다인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을 때, 인헌은 부서진 라디오 조각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마치 방금 전투를 치른 장수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저 상자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저건 그냥 라디오예요! 노래 나오는 물건이라고요!" 다인은 부서진 조각을 주워들며 한숨을 내쉬었는데, 저것도 도식 아저씨 창고에서 몰래 빌려온 건데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싶어 머리가 아팠다. 부품 몇 개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걸 보니 수리비가 만만치 않게 나올 것 같았고, 다인은 속으로 이달 아르바이트비에서 얼마를 떼어놔야 할지 계산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조각들을 한쪽에 쌓아두었다. "이거, 이거 그냥 못 쓰게 됐잖아요……" "……값을 치러야 하는 물건이었는가." 인헌이 그제야 조금 당황한 듯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는데, 다인은 그 말투에서 처음으로 미안함 비슷한 감정을 읽어낸 것 같아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왕이라는 사람도 사고를 치면 눈치를 보긴 하는구나 싶어서였다. 인헌은 그 후로도 여러 사고를 쳤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걸 신기해하며 계속 틀어대다가 바닥을 다 적셔놓기도 하고, 성냥불을 처음 보고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불씨가 지푸라기 더미로 옮겨붙어 다인이 부랴부랴 발로 밟아 꺼야 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지푸라기가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폐가 안을 채웠고, 다인은 콜록거리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불이야, 불! 왜 갑자기 그걸 던져요!" "저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커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위험한 물건이 아닌가." "위험한 게 아니라 조심히 쓰라고 있는 거죠! 이렇게 여기저기 던지면 당연히 위험해지죠!" 다인이 발로 마지막 불씨를 짓이기며 목소리를 높이자, 인헌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입을 다물었는데, 그 모습이 꼭 혼나는 아이 같아서 다인은 순간 화를 내다가도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당신, 정말 왕이긴 한 거예요?" 다인이 지쳐서 묻자, 인헌은 발끈하며 대답했다. "내가 청명국의 왕임을 의심하는가." "의심이 아니라, 왕이라면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모르시니까요." "청명국에는 이런 하급한 도구들이 필요치 않을 뿐이다." 그의 대답이 어찌나 당당한지, 다인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잃었다.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거면 애초에 라디오도 던지지 말고, 성냥도 안전하게 다루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왕이라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 또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다인은 인헌이 조금씩 낯선 세계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처음엔 뭐든지 경계하고 밀어내던 그가 어느새 그녀가 건네는 감자를 받아먹으며 "이 음식은 제법 먹을 만하군" 하고 시큰둥하게 말할 때, 다인은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렇게나 삶아온 감자 하나에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라니, 왕이라는 신분과는 참으로 안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 감자는 원래 그냥 삶아 먹는 거예요. 대단한 요리 아니에요." "……그렇군." 인헌은 감자를 씹으며 창밖을 응시했는데, 그 옆얼굴이 세필로 그린 그림처럼 정교해서, 다인은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스스로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었던 거지.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그의 옆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며 콧날을 따라 흘러내렸고, 그 순간 다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부엌 바닥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와 타다 남은 지푸라기 냄새, 그리고 부서진 라디오 조각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감자를 나눠 먹었다. 이상하게도 그 어수선한 풍경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이 나라의 음식은 대체로 이런 식인가." "이런 식이 뭔데요?" "단순하고, 꾸밈이 없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만든 거니까." 인헌은 그 말을 곱씹듯 몇 번 되뇌더니, 나머지 감자를 마저 입에 넣었다. 다인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청명국이라는 곳에서는 대체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았을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물어봤다가 또 무슨 거창한 설명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날 저녁, 다인이 폐가를 나서려 할 때 인헌이 불쑥 물었다. "너는 매일 이곳에 오는가." "올 수 있을 때는요. 왜요?" "……아니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는데, 그 뒷모습이 어쩐지 조금 외로워 보여서, 다인은 문을 닫으면서도 자꾸 그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저녁 빛이 그의 어깨 위에 얇게 걸쳐 있었고, 그 뒷모습이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정적이어서, 다인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뻔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인은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부서진 라디오, 흠뻑 젖은 부엌 바닥, 지푸라기를 태운 자국까지—전부 다 인헌이 벌인 사고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하루가 지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인은 인정해야 했다.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진 왕이라는 남자와, 소환족으로 태어나 늘 남의 소유물처럼 살아온 여자. 두 사람의 거리는 하루하루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직 누구도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인은 알지 못했다, 내일 저 폐가에서 또 어떤 사고가, 혹은 어떤 얼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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