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천한 미스트리스

5화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서연의 방을 나서던 참이었다. 하루의 마지막 순찰을 돌기 전, 아이가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복도는 조용했고, 등불 심지가 타는 냄새만이 옅게 감돌았다. 그때 복도 끝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수석 메이드님! 사모님이…" 목소리를 낸 하녀는 숨을 채 고르지 못한 채였다.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뛰었다. 계단 앞에 다다르자, 채린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크게 부딪힌 곳은 없어 보였다. 팔다리도 이상하게 꺾이지 않았고, 머리도 벽이나 계단 모서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만 그녀 주변으로 짙은 알코올 냄새가 자욱했다. 향각 없이도 알 수 있는 냄새였다. 술 냄새라기보다는, 며칠간 몸속에 쌓인 술기운이 한꺼번에 새어 나오는 냄새였다. "괜찮으십니까." 채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리? 아리 씨…"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일으켜 세웠다.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도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까지 옮기는 동안, 채린은 계속해서 뭐라 중얼거렸다. 발음이 뭉개져서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중 몇 단어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도현 씨…또 안 와…또…" 백도현. 그녀의 남편. 나는 그 이름이 채린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함께 새어 나오는 냄새를 기억해두었다. 술 냄새와 뒤섞여 있었지만, 그 아래 깔린 것은 분명히 구분되는 냄새였다. 슬픔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된 것, 원망이었다. 오래 묵어서 이제는 슬픔인지 원망인지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감정 같았다. 방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채린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이 꼭 저택 안에서 가장 낮은 곳에 숨으려는 사람 같았다. 돌아서기 전, 나는 협탁 위에 놓인 병들을 확인했다. 빈 병이 세 개였다. 라벨을 보니 독한 술은 아니었지만, 하룻밤에 마신 양치고는 상당했다. 이렇게 마시고도 걸어 다닐 수 있었다는 게 오히려 놀라웠다. '매일 이렇게 마시고 있었던 건가.' 병에 쌓인 먼지의 양을 가늠해보니,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한서준을 찾아갔다. 그는 마당에서 정원 손질을 감독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세웠다. "사모님이 자주 이러십니까." 한서준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대답할지 말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오랫동안 이 집의 비밀을 지켜온 사람 특유의, 신중하면서도 지친 표정이었다. "…석 달 전부터 심해졌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주인님이 바깥에 다른 처소를 두신 뒤부터입니다." '첩인가.' 나는 이수정이라는 이름을 서류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가정부라는 이름으로 저택 근처 별채에 머물고 있는 여자. 백도현의 첩이자, 이 집안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사람이자, 동시에 이 저택 전체를 흔들고 있는 사람. "주인님은 언제쯤 저택에 오십니까."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잠깐입니다." "용무는 무엇입니까." "…서류에 서명하실 일이 있을 때만 오십니다." 한서준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쌓인 피로가 섞여 있었다. 이 집의 붕괴를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이 얘기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이미 감정을 소진해버린 사람의 태도였다. "사모님은 알고 계십니까, 이수정이라는 분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모르는 척해야, 아직 부인이라는 자리는 지킬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대답을 들으며 지금까지 향각으로 읽어낸 모든 냄새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걸 느꼈다. 채린의 술 냄새, 서연의 두려움, 이 저택 전체를 감싸고 있던 눅눅한 슬픔. 심지어 한서준의 목소리에서 나던 마른 나무 냄새 같은 피로감까지도. 전부 백도현이라는 한 사람의 부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네.' 무너지고 있는 이유가 단순하다는 건, 오히려 좋은 소식이었다. 원인이 단순할수록, 그걸 이용하는 방법도 명확해지는 법이었다. 나는 한서준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의 뒷모습에서, 아주 오래전에 이 집을 포기한 사람의 체념이 옅게 풍겼다. 그날 오후, 나는 처음으로 서연에게서 다른 종류의 부탁을 들었다. 여느 때처럼 방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갔는데, 서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검집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다음 주에 은성 길드에 가야 해. 검술 훈련 때문에." "혼자 가십니까." "엄마가 같이 갈 사람 붙이라고 했어. 너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서연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언제나처럼 내 대답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가는 게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거야. 괜찮은지." 은성 길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목덜미가 살짝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향각이 아니라 순전한 직감이었다. 냄새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지만, 이름 자체에서부터 뭔가 낯익지 않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거기, 뭔가 있구나.'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이 저택 안의 냄새만으로도 이미 벅찬 상황에서, 저택 밖의 미지수까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채린의 술, 도현의 부재, 이수정이라는 여자, 그리고 이제는 은성 길드까지. '일이 너무 많아지는데.'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 저택 밖으로 나갈 기회는 흔치 않았다. 향각을 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건, 그만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가겠습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 옆얼굴에서 나는 낯선 냄새 하나를 새로 감지했다. 기대감. 지금까지 이 아이에게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두려움이나 긴장, 눈치 보는 감정만 익숙하게 맡아왔던 나로서는, 그 냄새가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검술 훈련이 그렇게 기대되십니까." 서연이 흠칫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나가는 거니까." '거짓말치고는 냄새가 너무 진한데.' 기대감이라는 냄새는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종류였다. 특히 이렇게 서투른 아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이건 또 무슨 냄새야." 나는 속으로 되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을 알아내려면 직접 은성 길드에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서연은 여전히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표정 뒤에 숨겨진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은성 길드라는 곳이 이 저택의 냄새들과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그 답을 찾기 위해선 아직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채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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