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형광등이 깜빡였다.
이도현은 마우스를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화면 속 캐릭터가 약초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레벨 87, 부직업 백초약사. 게임 안에서 그가 가장 오래 파고든 이름이었다.
책상 위에는 식은 컵라면 국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모니터 불빛만이 좁은 반지하 방을 채우고 있었다.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반지하 창문 위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도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늘 안에 이번 시즌 조제 랭킹을 마감해야 했다. 삼 년을 매달려 온 부캐였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 속 약초를 캐고 조합하는 일에 왜 그렇게까지 몰두하냐고. 하지만 이도현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완결되는 일이었다. 현실은 아무리 애써도 완결되지 않았다.
그때 조명이 다시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는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타는 냄새가 났다.
이도현은 코를 찡그렸다. 낡은 멀티탭이었다. 언제 갈아야 하나 생각한 게 벌써 반년 전이었다. 사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늘 다른 곳에 돈을 썼다. 월세, 밥값, 그리고 게임 아이템. 우선순위는 항상 뒤로 밀렸다.
손을 뻗어 전원을 뽑으려던 순간, 발밑에 고여 있던 빗물이 손끝에 닿았다.
번쩍.
온몸이 굳었다.
턱이 떨렸다. 눈앞이 하얘졌다. 근육이 제멋대로 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가 이내 얼어붙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졌다.
멀리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우는 게 아니었다. 그리움이었다. 형체 없는 그리움이 그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었다. 낯선 얼굴이 스쳤다. 작은 손. 땋은 머리. 그리고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
동생을... 찾아야 해.
그 목소리는 이도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현의 가슴에서 울렸다.
의식이 물처럼 섞여 들어갔다. 두 개의 삶이 하나의 파도 속에서 뒤엉켰다. 이도현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낯선 언어가 스쳤다. 낯선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낯선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두 겹의 기억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로 짜인 천장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그 위로 거미줄이 늘어져 있었다. 이도현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방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낡은 서랍장. 색이 바랜 병풍. 방 안 어디에도 형광등이 없었다. 대신 벽 한쪽에 촛농이 굳어 흘러내린 촛대가 놓여 있었다.
손을 들어보았다.
가늘고 흰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앙상했다. 손톱 밑에 핏기가 없었다. 이도현의 손이 아니었다. 이건 누구의 손인가.
손끝을 움직여 보았다. 낯선 근육이 낯선 방식으로 움직였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아니, 옷이 아니라 몸 전체가 남의 것이었다.
기침이 터졌다.
마른 기침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폐가 약했다. 몸 전체가 젖은 종이처럼 약했다.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도 가슴 안쪽이 뻐근하게 아팠다.
이도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침대. 벽에 걸린 빈 액자. 창밖으로 흐린 하늘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는 얇은 이불 한 채가 개켜져 있었다. 방 안 공기는 서늘했고, 습기가 벽을 타고 올라와 있었다. 오래도록 불을 때지 않은 방 특유의 냉기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련님."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잠겨 있었다. 입을 열려 해도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노인이 들어왔다. 등이 굽은 노복이었다. 낡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깃만은 정갈했다. 손에는 물그릇을 받쳐 들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노인이 다가왔다. 이도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했다. 몸 안 깊은 곳에서 낮은 울림이 퍼졌다.
천 노인.
그 이름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도현의 것이 아닌 기억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 이름을 부르는 방식과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낱낱이 떠올랐다.
"몸이... 안 좋으시군요."
천 노인이 이마를 짚었다. 손이 거칠었다. 오래 일한 손이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다.
"열은 없으신데."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도현의 눈빛을 살피더니 표정이 조금 굳었다.
"도련님, 눈빛이 평소와 다르십니다."
이도현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지."
천 노인의 눈썹이 움직였다.
"도련님?"
"내 이름이... 뭐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천 노인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물그릇을 든 손이 살짝 떨렸다.
"남궁하람. 남궁가의 마지막 도련님이십니다."
남궁하람.
그 이름이 몸속에서 메아리쳤다. 이도현은 눈을 감았다. 낯선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몰락한 가문. 빚. 텅 빈 곳간. 그리고 등을 돌리고 걸어가던 여인의 뒷모습.
기억은 조각나 있었다. 완전한 그림이 아니었다. 마치 깨진 거울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 같았다. 어떤 조각은 선명했고 어떤 조각은 흐릿하다 못해 검게 지워져 있었다.
"동생을..."
입에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천 노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또 그 말씀이시군요."
"뭘 안다는 얼굴이군."
"도련님께서 열이 오르실 때마다 하시던 말씀입니다."
천 노인이 물그릇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그릇 가장자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벌써 몇 달째 그러셨습니다. 열병이 도지실 때마다 동생을 찾아야 한다고, 잠꼬대처럼 되뇌셨지요."
이도현은 침대에서 다리를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휘청였다. 천 노인이 급히 팔을 붙잡았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괜찮아."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무릎이 후들거렸다. 이도현은 벽을 짚었다. 벽이 차가웠다. 진짜였다. 이 몸도, 이 방도, 이 냄새도 모두 진짜였다.
손바닥에 닿은 벽의 촉감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흙과 짚을 섞어 바른 벽. 오래된 습기 냄새. 게임 속 어떤 그래픽도 이런 질감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 여기 있는 건가."
혼잣말이었다. 천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도련님. 오늘 우 상단주가 다시 찾아올 겁니다."
이도현은 눈을 들었다.
"우 상단주가 누군데."
"가문의 빚을 대신 갖고 있는 자입니다. 벌써 세 번째 걸음입니다."
천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번에는 저택을 넘기라 할 겁니다."
이도현의 등에 서늘한 것이 흘렀다.
"세 번째라니. 앞의 두 번은 어떻게 넘겼지."
"넘긴 게 아닙니다. 미룬 겁니다. 도련님께서 매번 말재간으로 시간을 벌으셨지요. 하나 이번에는..."
천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일푼. 신원조차 증명할 수 없는 몰락 귀족.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도 모른 채,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이도현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보려 했다. 게임 속 캐릭터를 키우듯, 이 상황도 계산해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다. 죽으면 리스폰되지 않는 세계였다. 그 사실이 뒤늦게 명치를 눌렀다.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 노인의 얼굴이 하얘졌다.
"벌써 오셨군요."
말발굽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대문 앞에서 멈추는 소리, 뒤이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왔다.
이도현은 벽을 짚고 창가로 다가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끝이 문지방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손을 뻗을 새도 없었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고 손바닥이 깨진 화병 조각을 짚었다.
피가 흘렀다.
따뜻하고, 붉었다.
통증이 뒤늦게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이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 몸의 신경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아주 작은 상처에도 온몸이 다 아픈 것 같았다.
그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글자였다.
허공에 떠 있는, 분명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글자였다.
천 노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오직 이도현의 눈에만 보이는 빛이었다. 붉은 피가 손바닥에서 뚝뚝 떨어지는 동안, 허공의 글자는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