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초숲의 백초약사

4화

목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자 목소리였다. 짜증이 섞인 톤이었다. "먼저 간 게 아니라 앞서서 확인한 거요." 남자 목소리가 곧바로 되받았다. 억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확인이고 뭐고, 혼자 앞서가면 뒤에서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무섭긴 뭘 무서워. 여기 안전구역 근처인데." "근처라니까 문제인 거예요. 근처." 이도현은 나무 뒤에 몸을 살짝 숨기고 소리가 나는 쪽을 살폈다. 나뭇잎 사이로 흔들리는 불빛 하나가 먼저 보였다. 관솔불이었다. 낮게, 흔들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의 형체가 나뭇잎 사이로 드러났다. 한 명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등에는 자신의 것보다 두 배는 큰 망태기를 지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망태기 안에서 마른 잎끼리 부딕치는 소리가 났다. 다른 한 명은 그보다 작은 체구의 여자였는데, 허리춤에 낫과 작은 칼을 매달고 있었다. 걸음이 가볍고 빨랐다. 둘 다 옷차림이 낡았지만 정갈했다. 소매는 접혀 있었고, 손과 팔에는 오래 일한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손등의 잔주름 하나하나가 흙과 풀물로 얼룩져 있었다. 약초꾼이었다. 남자가 먼저 이도현을 발견했다.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순식간에 경계로 바뀌었다. "어이." 관솔불이 이도현의 얼굴 쪽으로 기울어졌다. "거기 누구요." 이도현은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도망친다고 해서 나아질 상황도 아니었다. "약초를 캐러 왔습니다." "이 시간에? 안전구역에서도 이렇게 늦게까지?" 여자가 눈을 좁히며 다가왔다. 손이 자연스레 허리춤의 낫으로 향했다. 손가락이 낫의 손잡이를 슬쩍 감쌌다가, 완전히 쥐지는 않았다. "복장을 보니 마을 사람 같지도 않은데." "남궁 저택 사람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관솔불이 타는 소리만 작게 이어졌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남궁... 그 몰락한 귀족 가문?" 남자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놀람과 의구심이 반쯉씩 섞여 있었다.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여자가 낫에서 손을 뗐다. 손끝이 스치듯 허리춤을 떠나는 게 보였다. "그 집 도련님이 병약해서 방에만 있다더니, 이 시간에 숲까지 나올 정도면 사정이 급한가 보네요." 말이 곧고 거침없었다. 에두르는 법이 없었다. 이도현은 그 말투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급합니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요?" 여자가 되물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데." "은아 씨, 처음 본 사람한테 그렇게 캐물으면 어떡해."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우린 강무열이고, 이쪽은 서은아입니다. 여기서 오래 약초를 캐먹고 살아온 사람들이오." "이도현... 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하람이라는 이름을 대는 게 아직 어색했다.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남의 옷을 걸친 듣한 감각이 스쳤다. 다행히 둘은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서은아가 이도현의 망태기를 힐끗 보았다. 눈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안쪽을 훑었다. "뭘 좀 캤어요?" "적근초랑 지혈초, 그리고 이건... 뭔지 모르겠습니다." 이도현이 망태기에서 청록빛 이끼를 꺼내 보였다. 손바닥 위에서 이끼가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서은아의 눈이 커졌다. 관솔불에 비친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걸 어디서 캤어요?"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낮고 진지해져 있었다. "경계석에서 얼마 안 들어간 자리였습니다." "이거 운초예요. 야밤에만 색이 나는 이끼인데, 낮에는 안 보이는 게 정상이거든요." 강무열이 다가와 이끼를 살폈다. 손가락으로 끝을 살짝 눌러보았다. 물기가 배어나왔다. "이 시간에 벌써 색이 났다는 건... 근처에 뭔가 있었다는 뜻인데."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관솔불 흔들리는 소리만 났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이도현은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오랜 세월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런 얼굴은 함부로 짓지 않을 것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서은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운초는 습기와 냉기에 반응해요. 마수가 지나간 자리 근처에서 색이 일찍 돌아요." 이도현의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경계석 앞에서 본 그림자. 사라진 기척. 조용했던 새소리. 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감각이었다.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오늘 안에 경계석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도현이 말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고요." 강무열이 망태기를 고쳐 메며 웃었다. 억지로 짜낸 웃음이었다. "걱정 마시오. 우리도 이런 낌새엔 감이 빠르니까. 벌써 스무 해도 넘게 이 숲을 드나든 몸이오." "스무 해요?" "그 정도 되지. 은아는 십 년이 좀 넘었고." "십 년 좀이 아니라 팔 년이거든요." "팔 년, 아무튼 그쯈." 셋은 함께 걸었다. 관솔불이 앞장서고, 이도현이 그 뒤를 따랐다.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가, 서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몸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요? 남궁 도련님 몸이 약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많이 나아졌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백초약사 각성 이후로 확실히 체력이 붙었다. 여전히 숨이 가빠지긴 했지만, 예전 같으면 이만큼 걷지도 못했을 거였다. 몇 달 전이라면 저택 뒷마당 한 바퀴만 돌아도 기침이 터졌을 것이다. "몸이 약한 도련님이 밤에 약초를 캐러 나올 정도면, 그 사정이라는 게 보통 일은 아닌가 보네요." 강무열이 옆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은아, 또 캐물으려고 그래?" "안 물어보면 이상하잖아요.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이도현은 대답 대신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에서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캐묻지 않는 게 서로에게 나은 일이었다. 걷는 동안 이도현은 주머니 속 청동빛 고리를 다시 꺼냈다. 손끝으로 문양을 매만졌다. 표면이 밤공기에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점. 선. 물결. 탑. 익숙한 순서로 문양이 눈앞을 스쳐 갔다. 서은아의 눈이 그것을 보고 멈췄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걷던 걸음도 멈췄다. "그거..."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이도현이 고리를 들어 보였다. "이 문양을 아십니까?" 강무열이 곁으로 다가와 함께 보았다. 관솔불을 가까이 들이대며 문양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얼굴도 함께 굳어졌다. 불빛이 그의 눈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말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말이 필요 없는 대화였다. "그 문양은... 함부로 꺼내면 안 됩니다." 서은아가 낮게 말했다. 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강무열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관솔불도 조금 더 낮게 내렸다. "자령단이라는 물건에 얽힌 문양이오. 요즘 이 근방에 그것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많이 돌고 있소." "자령단?"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가슴 깊은 곳, 남궁하람의 기억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미미하게 반응했다.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불러오는 온도 같은 것이었다. "그건 어디서 났소?" 강무열이 물었다. "제 어머니의 유품입니다." 정확히는 하람의 기억 속 유품이었다. 어머니가 여동생을 데려가며 남겨둔 물건이라는 것을, 그는 방금 확신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몸이 먼저 알아버린 사실이었다. 서은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 문양은 아무 데서나 보일 물건이 아니에요. 잘 숨기세요. 요즘 세상이 하도 흉흉해서." "흉흉하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뜻입니까." 이도현이 물었다. 서은아는 강무열을 한번 쳐다보았다. 강무열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저희도 확실히 아는 게 아니라서."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었다. 이도현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정보가 부족한 채로 밀어붙일 때가 아니었다. 이런 순간에 무리하게 파고들면, 있는 정보마저 닫혀버리는 법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이도현은 고리를 다시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손끝에 남은 감촉이 아직도 뜨거웠다. 어린 여동생의 목소리. 오빠, 이거 나 줄 거야. 그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장면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어머니의 등이 보였다. 차가운 뒷모습이었다. 옷자락이 발걸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여동생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대문 밖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말의 콧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어린 하람이 뒤에서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유난히 오래 귓속에 남았다. 이도현은 걸음이 흐트러지는 걸 느꼈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강무열이 곁에서 팔을 잡아주었다. "괜찮소?" "...괜찮습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무너지듯 아팠다. 이건 자신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진짜처럼 아팠다. 마치 오래전에 입은 상처가 지금 이 순간 다시 벌어지는 것 같았다. 남궁하람과 이도현, 두 자아가 그 기억 하나로 완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서은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색이 안 좋은데, 잠깐 앉았다 가는 게 어때요?" "아닙니다. 걸을 수 있습니다." 이도현은 스스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리에 힘을 주자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강무열의 손이 팔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경계석이 눈앞에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 형체는 유난히 뚜렷했다. 낡은 돌기둥, 표면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들, 그 아래 흐릿하게 남은 붉은 자국. 셋은 안전구역 표식을 넘어섰다. 숨을 돌리려는 순간, 발밑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 같은 게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마치 무언가 걷는 것처럼 땅이 울리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강무열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망태기를 짊어진 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이건..." 서은아가 낫을 뽑아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계가 흔들리고 있어요." 관솔불이 바람도 없이 크게 흔들렸다. 발밑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