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친구가 남긴 마지막 기적

5화

발표식은 성진의료재단 본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나는 검은 정장을 입고 무대 뒤편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원래 넥타이를 잘 안 매는 사람이라 그런지 자꾸 손이 그쪽으로 갔다. 지훈이 옆에서 순서지를 확인하고 있었고, 나는 손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긴장되십니까." 지훈이 물었다. "안 긴장돼." 거짓말이었다. 지훈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나도 안 믿는데 저 사람이 믿을 리가. ..사실 긴장되는 이유가 하나가 아니었다. 첫 번째는 그냥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무서웠고, 두 번째는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었고, 세 번째는— 세 번째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뭔가 계속 몸 안쪽이 이상하다는 거였다. 어제부터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걸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대기실 문 틈으로 강당 안이 보였다. 좌석이 거의 다 찼다. 장학생 후보로 뽑힌 학생들, 학부모들, 기자들, 성진재단 관계자들까지. 다들 정장이나 단정한 옷을 입고 앉아서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었다. 뻐억, 하고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도 들렸다. 저 안에서 나오는 사진들이 다음날 신문 어딘가에 실릴 거란 생각을 하니까 속이 더 불편해졌다. ..내 얼굴이 신문에 실린다고? 뭐 이런 인생이 다 있냐. 순서지 상으로 나는 성민 이름으로 신설된 장학금을 소개하는 짧은 인사말을 하고, 첫 장학생에게 증서를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나쁠 것 없는 역할이었다. 성민을 위한 일이니까. 성민을 위한 일이면 뭐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몇 번이나 스스로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성민을 위한 일이면 뭐든 한다. 성민을 위한 일이면 뭐든 한다. 나는 그 말을 무슨 부적처럼 씹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첫 장학생 후보로 뽑힌 명단 중에 한지호의 이름이 있다는 걸, 나는 무대에 서기 직전에야 알았다. "이거 뭐야." 나는 순서지를 보고 지훈에게 물었다. "한지호 학생이 이번 장학생 최종 후보 중 하나입니다. 성민 군의 학교 친구라는 점이 고려된 것 같습니다." 지훈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지훈 입장에선 문제가 없겠지. 하필 저 자식이랑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마주치나 싶었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발린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불편했다. 한지호, 그 자식. 얼굴은 성민이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말투는 왜 그렇게 사람 열받게 하는지. 어제도 나한테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문 닫히듯 사라졌었다. ..또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아니, 애초에 마주칠 일이 있나? 나는 무대 위에서 증서만 주면 끝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자꾸 그 자식 얼굴이 떠올랐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 됐다. 사회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걸어나갔다. 조명이 눈을 찔렀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찰칵찰칵찰칵— 나는 순간 눈이 부셔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발밑을 더듬듯이 걸어가서 지정된 자리에 섰다. 마이크 앞에 서니까 그제야 눈이 조명에 적응이 됐다. 준비한 인사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윤성민의 친구, 이도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목이 메었다. 준비한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순서를 잃고 뒤섞였다. 어젯밤에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무대에 서니까 다 날아갔다. 나는 겨우 몇 문장을 이어갔다. 성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마지막까지 웃으려고 애썼던 아이였다는 것, 이 장학금이 그 웃음을 조금이라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말을 하면서 앞줄을 슬쩍 봤다. 한지호가 거기 앉아 있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를 보는 건지, 다른 데를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말자. 말을 하는 도중 손끝이 저려왔다. 처음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손끝이 좀 간지럽다, 그 정도. 그런데 저림이 점점 강해졌다. 어제 모자를 만졌을 때 느꼈던 그 뜨거운 감각이 이번엔 손끝뿐만 아니라 팔 전체로, 그다음엔 가슴까지 퍼져나갔다. ..지금 이거 뭐야. 왜 지금. 하필 지금. 하필 이 자리에서. 야구 하다가 공에 맞았을 때도 이 정도로 갑작스럽진 않았다. 이건 그냥 통증이 아니라 뭔가가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말을 멈췄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내가 감정에 겨워 말을 멈춘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유였는데. 이거 감동해서 멈춘 거 아닌데요. 몸이 이상해서 멈춘 거예요. 속으로 그렇게 외쳐봤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마이크를 쥔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이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로 증폭돼서 강당 전체에 울렸다. 우웅— 낮은 진동음이 퍼졌다. 몇몇 사람들이 그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겨우 다음 문장을 이어가려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앞줄에 앉아 있던 여학생 몇 명이 일제히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눈이 이상하게 풀려 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낯설어서 나는 순간 내가 뭘 잘못 봤나 싶었다. "어..." 나는 말을 잃었다. 앞줄 여학생 하나가 손을 뻗으며 무대 쪽으로 다가오려는 걸 옆 사람이 붙잡았다.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퍼졌다. "저 사람 왜 저래?" "쟤 뭐야?" "얘, 너 왜 그래, 정신 차려."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더 미친 듯이 터졌다. 기자들이 이 상황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더 낮게 겨눴다. 몇몇은 벌써 스마트폰을 꺼내서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이거 인터넷에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나는 손끝을 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마치 손톱 밑에 작은 형광등을 켠 것처럼, 옅은 빛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다. 이건 이제 감각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성민아, 이거 뭐야. 진짜 뭐냐고. 지훈이 무대 옆에서 다급하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뭐라고 하는데 소리는 안 들렸다. 아마 "내려오세요" 아니면 "괜찮으십니까" 그런 거겠지. 나는 그를 봤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에 힘이 안 들어갔다. 서 있는 건지 그냥 버티고 있는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앞줄에서는 이제 세 명, 네 명의 여학생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쪽으로 걸어오려 하고 있었다. 보호자들이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한 어머니는 딸의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고, 딸은 그 손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을 쳤다. "도현 오빠..." 누군가 낮게 그렇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여학생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애를 만난 적도 없었다. ..오빠라니. 나 저 학생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게 무슨 심리일까. 아니, 심리가 아니라 이건 그냥 현상이잖아. 뭔가에 씌인 것 같은. 장내가 완전히 소란스러워졌다.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진행을 이어가려 했지만 이미 통제가 안 되는 분위기였다. "여러분, 잠시만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몇 번이나 외쳤는데 아무도 안 들었다. 몇몇 학부모들은 자기 딸의 이상 행동에 놀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얘! 은지야! 정신 차려!" 나는 그 순간 뒷걸음질쳤다. 손끝의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걸 멈추는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멈추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성민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소원만 남기고 사용법은 안 알려주고 죽어버렸다. ..윤성민 이 자식아, 이거 무슨 짓이야. 나한테 소원 들어준다고 말만 해놓고, 부작용은 이런 식으로 오는 거야?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뭐 이런 무책임한 유언이 다 있어. 속으로 성민한테 화를 냈다가, 곧바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죽은 애한테 화내는 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무대 조명이 순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조명이 흔들린 게 아니라 내 눈에 이상이 생긴 거였다. 시야 한쪽 구석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안경에 김이 서린 것처럼,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귀도 이상했다. 사람들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강당 뒤편을 슬쩍 봤다. 좌석 사이에서 낯선 사람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정장을 입은 남녀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 둘의 표정은 홀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침착하게, 정확히 나를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유난히 차갑고 또렷하게 느껴졌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여학생들이 무대로 몰려오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는데, 그 둘만 마치 다른 시간대에 서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정확했다. 나는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시작됐구나.' 뭐가 시작됐다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 뭐야. 기자야? 아니, 기자는 저런 눈으로 안 봐. 재단 관계자야?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치던 나는 그대로 무대 아래로 발을 헛디디며 균형을 잃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