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몇 주가 지나면서 나는 점점 이 두 번째 인생의 흐름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 반복될수록 이 삶이 마치 이미 한 번 읽은 소설의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것처럼 익숙해졌는데, 그 익숙함이 어느 순간부터는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서늘한 불안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업무는 예전에 겪었던 것과 거의 똑같이 흘러갔고, 회의 시간에 누가 어떤 발언을 할지, 어떤 실수가 벌어질지도 대부분 예측이 가능했다. 김 과장이 프레젠테이션 자료 순서를 헷갈려 당황하는 순간이나, 팀장이 갑자기 예산 얘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순간까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럴 때마다 나는 미리 방지하거나, 혹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며 조용히 내 위치를 다져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유독 신경 쓰이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소은이었다.
첫 번째 인생과 똑같이 그녀는 마케팅팀 신입으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다시 그녀와 마주치는 순간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 커피를 사달라고 조르던 그 모습,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설렘 가득한 표정이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순수하게 그 웃음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각도로 컵을 헹구고 있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언제나 삼 초쯤 늦게 도착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도 첫 번째 인생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완벽한 반복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삶이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알면서도 매번 새삼 낯설었다.
"오빠,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소은이 묻는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이번에도 결국 그녀와 다시 연애를 시작하게 될까. 이미 벌어질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주저하는 걸까. 손끝이 미묘하게 저려오는 걸 느끼며,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첫 번째 인생 마지막 순간의 그 표정을 겹쳐 떠올렸다. 눈물도 없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저 지겹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을. "어, 아마 될 것 같아." 결국 나는 첫 번째 인생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고, 소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을 때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언젠가 다가올 배신의 순간을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카페에 앉아 그녀가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나는 절반쯤 다른 시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웃으며 내 손을 감싸 쥘 때, 나는 그 손이 언젠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게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이 내 가슴을 조용히 짓눌렀다.
소은은 그런 내 태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척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결국 물어왔다.
"오빠, 요즘 좀 이상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캐묻자 나는 시선을 피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요즘 회사 일이 좀 많아서 그런가 봐." 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소은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넘어갔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문자를 보내는 빈도가 줄었고, 통화 중에도 그녀의 말끝이 예전보다 짧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그저 다가올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관계가 무너져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그 무렵, 다른 부서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남자 하나가 눈에 밟혔다. 박준서. 첫 번째 인생에서 소은과 바람을 피웠던 그 남자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은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회의실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준서는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예전처럼 무심한 척 서류를 정리하며 지나갔지만, 지나가는 길에 마케팅팀 쪽으로 시선을 흘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도 나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태민의 눈빛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친한 동기의 관심 정도로 여겼는데, 요즘 들어 그는 나를 보는 시선이 유독 날카로워졌다는 걸 느꼈다. 점심을 같이 먹을 때도 그는 예전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기보다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 눈빛 속에는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야, 이도현." 어느 날 점심시간, 태민이 나를 옥상으로 불러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옥상에는 바람이 제법 세게 불고 있었고,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봐. 요즘 너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응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회의 때 말이야. 누가 뭐라고 할지, 무슨 실수가 나올지 미리 아는 것처럼 행동하잖아. 처음엔 그냥 눈치가 빠른가 했는데, 이건 좀 그 이상이야." 태민의 눈빛이 진지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난주엔 저기 있는 자판기 고장 날 거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잖아. 그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주 맞아."
손끝이 저릿해지고 목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이걸 그냥 우연이라고 우겨야 하나, 아니면 다른 변명을 만들어내야 하나. 나는 옥상 난간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잠시 숨을 골랐지만, 태민의 시선은 여전히 내 옆얼굴에 박혀 있었다. "…그냥, 감이 좋은 거지." 나는 결국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태민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이 좋은 거라고 치자. 근데 도현아, 너 진짜 뭐 숨기는 거 없어?" 그가 재차 묻는 말에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 사람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타임루프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이 관계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멀어지게 될까봐, 아니면 더 깊이 파고들어 결국 진실을 눈치채게 될까봐, 두 가지 두려움이 동시에 목을 조여왔다. "없어. 진짜로." 나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태민의 시선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태민은 나를 관찰하듯 지켜보는 눈치였고, 나는 그 시선을 느낄 때마다 심장이 서늘해지는 걸 참아야 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도, 회의실에서 마주 앉을 때도, 그의 눈은 유독 오래 내게 머물렀다가 슬쩍 비껴가는 식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마다 나는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비밀을 숨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터져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