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저녁, 퇴근길에 나는 유난히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서윤아의 그 하얗게 굳어진 얼굴이, 그리고 태민의 그 미묘한 시선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는데,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전동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는 순간에도 나는 두 사람의 표정만을 번갈아 떠올리며 정작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만약 태민이 진실을 알아차린다면, 서윤아가 그동안 얼마나 조심스럽게 숨겨왔던 마음이 순식간에 드러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 불안은 전동차의 흔들림에도 흩어지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를 따라붙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천장의 무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세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 창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느껴지던 그 밤, 결국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첫 번째 인생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입사 2년 차, 야근이 유난히 잦았던 시기였다. 매일같이 밤늦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나에게, 누군가는 늘 아이스커피를 조용히 놓고 갔었다. 처음엔 누가 그러는 건지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는데, 나중에는 그 커피가 어느새 나에게 작은 위안이 되어 있었다. 얼음이 다 녹아 김이 서린 컵을 손에 쥐면서도 나는 그게 누구의 손에서 온 것인지 궁금해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늘도 힘내세요.' 어느 날엔 그런 짧은 메모가 커피 옆에 붙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였는데도 어딘가 정성이 담겨 있어서, 나는 그때 그 메모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정작 누가 그런 건지 알아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저 회사 어딘가에 마음씨 좋은 누군가가 있나 보다, 하고 넘겨버렸을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소은과 한창 연애 중이었고, 그녀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주변을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였다. 퇴근 후에는 소은과의 통화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주말이면 그녀와 함께 보낼 시간을 계산하느라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은이 다른 남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옮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도, 결국 그런 무심함에서 시작된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회사 워크숍이 있던 어느 날. 밤늦게까지 남아 자료를 정리하다가 문득 로비 자판기 앞에서 서윤아와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녀는 유독 하얗게 보였는데, 손끝으로 캔의 물기를 닦아내며 조심스레 내밀던 그 손짓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이거 드세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캔커피 하나를 내밀며 말했었다. '늦게까지 고생 많으시네요.' 그 순간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배려라고만 생각했었다. 나는 대충 고맙다고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을 뿐,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소리 없이, 티 내지 않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조용히 곁을 지켜주던 존재. 회식 자리에서도 늘 구석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채워주었고, 내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도 먼저 나서서 감싸주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수습을 도왔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소은에게만 매달려 있다가 결국 배신당하고 무너졌던 거였다.
왜 그때는 몰랐던 걸까. 왜 그렇게 가까이 있던 진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나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서윤아의 마음을 알아챘더라면, 어쩌면 이번 인생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소은과의 이별이 그토록 처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군가의 곁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뻗어나가자,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나는 지금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상태였다.
문제는, 이 두 번째 인생에서도 나는 여전히 소은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언젠가 다시 첫 번째 인생과 같은 결말로 치닫게 될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소은과의 관계를 당장 끊어낼 수 없는 이유는 나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은 확신이 없어서였을지도, 어쩌면 두 번째 인생마저 첫 번째처럼 흘러갈까 두려워서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서윤아의 자리를 슬쩍 살폈다. 그녀는 어제의 그 소동이 부담스러웠던 듯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고, 어깨가 유난히 움츠러들어 보이기도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순식간에 시선을 피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반응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시 그녀의 자리 쪽으로 다가갈까 고민했지만, 괜히 다가갔다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그 커피 말이야." 태민이 낮은 목소리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걸 보면, 내가 얼마나 서윤아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거 서윤아 씨가 놔둔 거지?" 그의 눈빛은 이미 확신에 가까웠고,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을 걸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결을 띠고 있다는 걸 나는 직감했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했고,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답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나는 겨우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나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태민이 그 흔들림을 놓쳤을 리 없었다.
태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처음 보는 낯선 그늘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갔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 표정은 뭘까. 저 눈빛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태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타고 스며들었다.